평신도 운동 초석된 초대교회 가정 공동체
주 제 : 성직자 부재시기의 평신도
발제자 :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
성직자 부재시기(1801~1834)라 함은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뒤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의 평신도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북경교회와 연락하여 사제를 영입하는 일과 둘째, 박해의 위협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이는 교회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사제를 파견해준다는 보장도 없이 사제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래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래를 자임하고 나선 인물이 이여진(요한)이다.
이여진은 1811년 조선 신자들의 소망을 담은 서한 2통을 가지고 북경으로 떠난다. 그 서한은 훗날 포르투갈어로 옮겨져 교황청으로 보내진다.
조선 신자들이 적은 서한의 내용은 다섯 가지로 ▲사제파견 ▲외교인과 어울려 사는 신자들의 계명을 완화해 줄 것 ▲교회서적과 성물을 보내줄 것 ▲선박을 보내줄 것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국경 부근에 점포를 개설 해 줄 것 등이다.
하지만 중국교회도 박해로 인해 상황은 좋지 않았다. 1812년 조선신자들은 다시 한 번 이여진을 보내 서한을 전달하지만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제영입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하지만 이 운동이 재개된 것은 정하상(바오로)에 의해서였다. 이여진이 북경을 다녀간 후 1816년 정하상이 다시 찾아가자 그곳의 선교사들은 또 한 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라게 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현재의 위치를 갖게 된 바탕에는 이같은 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박해를 극복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한 교우촌의 평신도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심함양과, 교리실천, 복음전파 활동을 성실히 수행했다.
교우들은 비밀교회로서의 신앙공동체 즉, 교우촌에 터전을 두고 있었고 그 교우촌과 개개인의 신앙을 유지시켜 준 바탕에는 가정 공동체가 있었다. 유교질서와 교회의 가르침이 어우러지며 성가정이라는 모범적 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앙의 생활화, 나눔과 봉사의 실천, 복음 전파 활동은 지속될 수 있었다.
신유박해 이후 교우 가족들은 신자가족이라는 사실을 감춰야만 했으므로 외교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잦은 묵상과 나눔을 실천하며 사제영입과 성사의 열망을 이어나간다.
그들의 이러한 삶과 행위는 살아있는 복음의 전달이었으며 그것은 신입교우들에게 신앙생활을 실천해 나가는 모범이 됐다.
박해시대의 평신도들은 자발적으로 순교신심을 함양하는데도 노력했다. 어떠한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새 입교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도 교우촌에 새로 들어온 가족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박해를 극복하고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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