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주 (10월 11일)
주 제 :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
발제자 : 한국교회사연구소 조현범 박사
“평신도 지도자 헌신적 활동 한국교회 초석”
오늘 강의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한 때(1836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기까지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과 삶의 자세를 살펴보기로 한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돕고 사목활동의 조력자로서 헌신적 삶을 살았던 조선 평신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사 안에서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835년,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오고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면서 모방 신부만이 조선으로 들어온다. 이때 그를 안내한 교우들이 유진길, 정하상, 이광렬, 조신철과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이다.
지도자들은 모방 신부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고 고해성사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또 선교사 대신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맡아 이끌며 주일과 축일에 교리문답과 복음성경, 성인전기 등을 읽고 낭독한 대목을 해석하기도 했다.
1840년이 지나자 기해박해는 거의 마무리됐다. 살아남은 평신도 지도자들은 천주교 신앙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 틀을 유지하면서도 다시 신자들을 불러 모으고 선교사들을 영입해야했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 기록하는 일도 해야 했다.
1845년 뱃길을 따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 김대건 신부가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이들을 맞이한 것도 역시 박해에서 살아남은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하지만 세명의 성직자가 입국한 기쁨도 잠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면서 박해가 발발하고 주요 지도자들 또한 순교, 1853년에는 페레올 주교마저 선종하고 만다.
이처럼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 철종 통치시대를 맞이하자 천주교에 대한 상대적 안정기가 도래했다. 따라서 천주교를 동정적으로 생각하며 입교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기존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돌보는 일은 선교사들이, 믿지 않는 외교인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맡게 된다.
즉 박해 시대 조선 천주교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교사명을 감당한 이들은 평신도 사도들이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선교사들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외교인들에게 나아간 평신도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종합해보자. 박해시대 평신도 지도자들은 ▲북경과 한양을 오가며 성직자들을 영입하고 ▲조선말과 풍습을 가르쳤으며 ▲복사로서 선교사들의 교우촌 사목 방문을 미리 계획하고 배정하거나 ▲성직자가 상주하지 못하는 교우촌의 어른으로서 성직자의 일부 역할을 수행했고 ▲각종 교리서들을 발간했다.
평신도 지도자들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교회활동이 없었다면 한국 천주교회는 자주적 지역 교회로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점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모든 것을 관장했던 에도 시대 일본 천주교회가 박해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쇠퇴했던 것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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