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감수하는 신앙자세 견지하고
조용한 ‘성찰’로 건강한 교회 이뤄야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첫째 편지와는 달리 격렬할 정도로 논쟁적이다. 또 첫째 편지와는 내용이나 표현법도 다르다. 그래서 이 편지는 첫째 편지를 쓴 사람과는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편지도 첫째 편지처럼 베드로 사도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수행 비서가 베드로 사도의 말을 대필하거나, 혹은 그 사상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편지의 저자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이 편지는 교회의 부패 문제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오늘날 신앙인들의 신앙살이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다. 고려시대 말기 불교의 폐해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도 다르지 않다. 불교와 유교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문제다.
조선시대의 그 요란한 당파싸움은 유교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어서가 아니다. 유교를 믿는 유생들이 자신들의 안위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그렇다. 가끔 조계종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태도 불교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몸으로 깨닫지 못한 일부 스님들의 ‘집착’ 때문이다. 부처님은 “버려라”고 하는데 일부 스님들이 버리지 못한다.
그나마 불교와 유교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다. 과거 불교가 고려를 망하게 하고, 유교의 사색당파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는 단초를 제공했듯이, 지금 어쩌면 우리나라를 망칠 종교는 그리스도교일지도 모른다.
불교와 유교는 이미 예전에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숙하고, 조용하고, 성숙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어떤 면에서는 ‘설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은 설치지 않았다. 들떠있지 않았다. 늘 새벽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루카 4, 42 참조). 바오로 사도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 2)라고 권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은 희생이다.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 ‘작은 희생’이 아니다. 십자가로 가는 희생이다. 종교는 어떤 학문보다 심오하다. 일반 학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일반 학문이 보통 정신(이성)적, 육신적 차원이라면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어 깊이 있는 영적 차원까지 들어간다. 수련, 말 그대로 스스로를 닦고 훈련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생활 조금만 하면 마치 다 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대충, 조금만 알면 무척 많이 아는 것처럼 설친다. 그래서 종교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다. 종교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때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충 세례성사 받고, 성경공부 조금 했다고 해서 신앙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 계층에 있을 때 교회에 부패가 생긴다.
물론 조용하고, 깊이 있고, 성찰하는 그런 종교는 따분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불교가 서양에서 주목받는 것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겉의 화려함이 아니라 내면의 깊이를 추구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한가. 오늘날 한국사회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예수를 진정으로 깨달으려는 마음이 없다는데 있다. 그래서 교회도, 민족도 망친다.
건강하고 차분하고, 묵직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류에게 가톨릭교회라는 큰 배를 주셨다. 작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이는 조약배가 아니다. 전 세계 인구의 25%를 안고 있는 큰 솥단지다. 작은 불꽃에도 쉽게 달아오르는 양은냄비가 아니다.
불교의 대승불교라는 말 자체가 ‘큰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의미다. 물론 소승불교를 폄하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긴 하지만 ‘작은 수레바퀴’아닌 ‘큰 수레바퀴’를 굴리겠다는 그 포부가 어디인가.
노래방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마다하라는 것이 아니다. 놀 때는 놀되, 묵직하고 가치 있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진리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보기에 당시 교회 내 부패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문제가 심각했다. 아는 척, 잘난 척, 높은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편지는 그들에게 보내는 호된 질책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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