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폐지선포식 특집- '실질적 사형폐지 국가' 들기까지
사형폐지로 '인권선진국' 큰 걸음 딛자
지난 1948년 건국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는 1000명을 넘는다. 이 가운데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979명, 매년 20명에 이르는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셈이다.
엄혹한 독재정권 아래 1970년대까지 사형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몇몇 뜻있는 종교인이나 학자들간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법정에 서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1987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힘을 얻기 시작한 사형폐지운동은 1989년 유엔 총회가 사형폐지결의안을 가결한 것에 힘입어 그해 5월 30일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 불교 등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출범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9년 헌법재판소가 창설된 후 사형제도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92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8만6509명의 서명을 받아 헌법재판소에 사형제도폐지 촉구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우리 사회의 행보는 답보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사형폐지운동이 소수 지식인 계층이나 인권운동가를 중심으로 이뤄져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민들의 범죄에 대한 시각도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1999년 10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죄인을 감옥에 보내는 목적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란 응답이 53%로 전 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높았다(전 세계 평균은 32%).
반면 ‘교화시키기 위해서’와 ‘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각각 19%, 15%에 그쳤다. 2003년 갤럽조사에서는 사형제에 대한 찬성(52.3%)이 낮아지고 반대(40.1%)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 등 흉악범죄가 발행할 때마다 ‘사형제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사형폐지운동은 2000년 대희년을 계기로 범종교적인 운동으로 확산됨으로써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전기를 맞는다.
사형제도 폐지의 당위성을 알리고 실천을 촉구하는 선에 머물던 사형폐지운동은 2001년 1월 19일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등 7대 종단의 종교인들이 모여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을 결성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가 하면 시민사회단체들과 사형제도폐지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활동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
아울러 과거 성명서 발표 수준에 머물던 사형폐지운동은 대국민 순회강연회, 연극제, 음악회 등 각종 문화행사와 교육 프로그램, 국회 및 행정부를 대상으로 한 활동 등으로 다양하게 확산됨으로써 ‘생명문화’의 건설이 종교인뿐 아니라 의식있는 이들의 주요 의제로 자리잡아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와 정부에 사형제도폐지 입법을 권고하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국제앰네스티가 우리나라를 사형제도 폐지 집중 캠페인 국가로 선정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이루며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국제적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사형폐지운동은 ‘실질적 사형폐지’라는 현실적 성과를 밑거름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법과 제도적으로 완전한 사형폐지를 이뤄내 인권선진국을 향한 더 큰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아울러 범죄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 제도적 지원을 비롯,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화해, 나아가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국제 연대 등을 통해 사형폐지운동이 생명의 문화를 확장하고 인류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기조연설(요지)
“오늘은 인권 승리 기념일”
우리나라에서 사형 집행은 특별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7년 12월 대량 사형 집행이 이뤄진 후 저와 노무현 대통령 집권 1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두 정부는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을 겸허히 수용했다.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되어 오늘 선포식을 갖게 돼 참으로 뜻 깊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동안 사형제 폐지를 위해 헌신해온 인권단체, 종교계, 기타 뜻있는 국민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하고 승리를 축하한다.
우리는 왜 흉악범에 대해서조차 사형 집행을 반대하는가. 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가.
첫째, 인간 생명은 하늘이 준 천부인권이다. 생명의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하느님 자식의 생명을 인간사회가 말살할 수 없다.
둘째, 사형은 흉악범을 이 세상에서 말살함으로써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집행은 사람의 생명만 헛되이 말살시킬 뿐 사회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인간의 오판이나 독재적 권력에 의해서 무고한 생명을 말살시킨 경우가 많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예를 수없이 보고 있다. 인혁당 사건 하나만 보아도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저도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이 확정됐던 사람이다. 당시 국민의 힘과 세계여론의 저항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저와 제 가족이 겪었던 고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넷째, 천사와 악마가 다 같이 있는 인간 마음의 특수성에 있다. 어떠한 흉악범도 개과천선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 비록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천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그 기회를 박탈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다섯째, 이미 세계 131개 국가가 법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거나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사형폐지국가가 되었다. EU는 가입조건으로 사형폐지국가라는 자격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다 같이 사형제를 폐지할 역사적 시점에 도달했다.
오늘 사형폐지국가 선포식은 우리의 인권운동사상 가장 뜻 깊은 날이요, 최대의 인권승리의 축하일이다. 이제 한국도 인권 선진국가 대열에 참가하게 됐다. 오늘 선포식을 계기로 생명에 대한 외경, 세상의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메시지가 온 국민의 마음속에 퍼져나가길 기원한다.
◎‘사형폐지국가 선포문’ 요지
“대한민국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우리는 ‘세계 사형폐지의 날’을 맞아 오는 12월 30일 대한민국이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됨을 선포한다.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 사형집행이 있은 후, 반문명적이고 반인권·반생명적인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지난 10년간 사형집행이 단 한건도 없었기에, 이제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사형제도는 인간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국가가 직접 침해하는 반인권적인 형벌로서,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이 적극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제도다.
또한 형벌의 기능이 지니고 있는 교화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고, 범죄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회의 불완전한 요소들에 대한 사회적 공동 책임을, 범죄자에게만 지우는 무책임한 행위다.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형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정신적·제도적 지원을 통해 안정을 회복해 사회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오판의 가능성과 더불어 형벌의 기능을 상실한 사형제도는 오히려 더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뿐이다.
대한민국은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사국이며,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다. 유엔은 이미 전 세계 회원 국가에 사형제도 폐지를 촉구하였고, 이를 위한 결의안과 선택의정서를 채택했다.
이번 제62차 유엔 총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형제도폐지 글로벌모라토리엄 결의안’ 역시 통과가 유력하다. 이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에 걸맞게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접어든 이 때 국회가 더 이상 늦추지 말고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 ‘사형폐지국가’를 완성하고 인권 선진국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사형폐지를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 사형집행 유예 정책을 펴온 지 10년을 맞은 대한민국이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되었음을 온 국민과 국제사회에 선포한다.
하나, 대한민국은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사국으로서 제62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는 ‘사형제도폐지 글로벌모라토리엄 결의안’에 적극 찬성한다.
하나, 대한민국은 사형제도가 사실상 폐지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인권선진국으로 도약하여,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쳐나갈 것을 천명한다.
2007년 10월 10일
사형폐지국가 선포식 참가자 일동
사진설명
▶10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사형폐지국가 선포식'에서 국제 앰네스티 유스(youth)동아리 학생들이 '희망, 생명의 내일'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선포식에서 유영철 연쇄 살인사건의 피해자 고정원씨(왼쪽)와 사형수 아들을 둔 가해자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상봉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이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형수의 대모' 조성애 수녀가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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