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주 (10월 18일)
주 제 : 신앙의 자유 획득 시기의 교회 재건과 평신도
발제자 :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 부소장
신앙의 자유 획득 시기란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를 가리키는 시대다. 오늘은 이 시기에 전교회장, 명도회장으로 활동한 김기호 요한(1824~1903년)의 일생을 통해 당시 시대상황과 교회의 모습을 짚어보기로 한다.
김기호 요한은 1824년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과거시험에 합격, 10년 동안 출세와 진로를 생각해 명사들을 찾아 교유하며 진리를 터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중병을 앓게 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 유?불?선 3교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나 뜻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히 옛날 친구인 서울 남촌후동의 이마두를 찾아가 ‘성세추요’를 접하게 됐다. 책 내용은 천주존재, 천지창조 등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담고 있었다.
그는 세례성사를 받은 후 낙향해 복음전파를 시도했으나 집안과 문중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 후 황해도로 이동하여 공소를 마련하고 전교에 힘썼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서 서울에 올라와 세례를 받게 했으며, 공소에는 매일 5~6명이 교리를 배우러 찾아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황해도 황주 병영에서 40명, 해주 감영에서는 80명이 순교했다. 이때 김회장은 피난해 10여년간 훈장 노릇을 하며 순교의 길을 가지 못하고 박해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1876년 병인박해가 끝나자 그는 새로 입국한 블랑 신부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양주, 춘천 등지의 공소를 순회, 전교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중국에서 입국한 리델 주교와 두세 신부, 로베르 김보록 신부를 황해도 백천공소에서 영접했다.
리델 주교의 명을 받아 그는 두 신학생을 데리고 경기도?강원도 일대에서 전교했다. 병인박해 후 다시 포교활동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그는 블랑 주교의 명으로 서울과 황해도 지방의 박해 시대 냉담 신자들에게 회두를 권면했다.
한편 1882년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프랑스에도 문호를 개방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조선교회는 그해 5월부터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재판을 시작했으며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시신을 발굴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고아원과 양로원도 설립했다.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설립,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을 맡게 된다.
1886년, 오랫동안 기다리던 한불수호조약이 맺어졌다. 이듬해 조약이 공포돼 드디어 신앙의 자유가 이뤄지게 되며 교회는 급성장한다.
김회장은 신자들을 보다 쉽게 가르치기 위해 천주조성, 칠성사, 사후심판 등과 같은 도리를 조목대로 나누어 저술, 50일간 각 도의 전교회장들에게 도리를 가르치게 된다.
그의 사상과 신앙의 근본은 애주, 애인의 덕을 실천함에 있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전교활동에 힘썼다. 또한 그의 평소 생활모습은 늘 정절을 지키고 은거의 삶을 산 재가수도자의 삶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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