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서 벗어나 ‘시작의 땅’ 향했다
‘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기획을 시작합니다. 수원교구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을 위해 선택한 이번 기획은 수원교구 뿌리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자 교우촌 영성의 향기를 찾아가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번 순례에선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기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의 최소한의 도움을 받으며, 대부분 도보로 진행될 것입니다. 땀과 기도로 엮어나갈 이번 기획에 교구민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를 바랍니다.
기찻길. 인생을 닮았다.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고, 굽은 길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곧은 길이 나온다. 긴 터널(어둠)과 굴곡, 고난을 뛰어넘어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려야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점에서도 닮은 꼴이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시계 긴 바늘이 한 바퀴도 채 돌기 전에 양평역에 도착했다. 10여 명이 기차에서 내렸다. 서늘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옷깃을 세웠다. 가슴을 죄어오는 삶의 경쟁, 빨리 빨리 패스트푸드, 빛을 가린 빌딩들, 탁한 공기, 말 말 말…. 그 모든 것에서 떠나왔다.
135t의 육중한 기관차가 서서히 땅을 밀어내고 있었다. 3000마력. 기관차는 3000마리의 말이 끄는 힘으로 14량의 객차를 이끌기 시작했다. 첫 걸음은 힘겨워 보였지만 차츰 탄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선로 위를 미끄러졌다. 기차는 그렇게 천천히 양평역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종종 걸음이다. 기차가 사라진 곳을 한참동안 쳐다보다, 가장 늦게 역을 빠져나왔다.
시야가 확 트였다. 좌우로 눈길 주지 않고 곧장 걷자 잠시 후 한강을 만났다. 햇살에 비친 한강의 물비늘이 눈부시다.
신앙의 씨앗 뿌려진 곳
한강을 끼고 국도변을 따라 서울 방면으로 20여 분 걸었을까. 수원교구 양근성지(전담 권일수 신부,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 031-775-3357) 안내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는 ‘한국교회의 요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반도에 신앙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땅이라는 점에서 학계에선 오래 전부터 이 성지를 주목해 왔다.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성지’다. 성당도 현재 외벽만 건립돼 있어 미사는 비닐하우스에서 봉헌한다.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신부가 환한 얼굴로 반겼다. “잘 오셨습니다.” 권신부가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성지를 안내한다. 성지를 찾는 신자가 적다보니 그 반가움이 더한 듯 했다.
“한국교회 창설 주역, 권철신, 권일신,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 조숙-권데레사 동정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혹은 살다 순교한 곳입니다.”
한국교회의 첫 자리에 서 있다. 이곳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도 가능했다. 한민족이 하느님 신앙을 처음으로 접한 땅. 한민족이 하느님께 손을 내민 땅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도, 수많은 교우촌의 형성도 모두 이곳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성당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는 기쁨도, 신앙에서 오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부활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곳에서 출발한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손이 모아진다.
대형 십자가가 눈을 끌었다. 한 십자가에 예수님이 두 분이다. 예수 1은 성지를, 예수 2는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간 내면의 영혼과 세상을 함께 바라보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십자가 아래서 한참동안 기도했다. 한 번은 한강을 향한 예수와, 또 한 번은 성지를 향한 예수와 함께였다.
비닐하우스 성당서 미사를
십자가 바로 옆에는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 내부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건립기금의 부족으로 당분간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성당에는 발도 들여 놓지 못한 채, 십자가 뒤를 돌아 아담하게 조성된 십자가의 길로 내려섰다.
억새 군락이다. 한강과의 그 조화가 절묘했다. 사람은 역시 분위기를 타는 동물인가 보다. 평상시에는 지루하게 느껴지던 십자가의 길 기도가 ‘술술’이다. 영혼이 기뻐했다. 기도를 마치고 올라오자 권신부가 신신당부한다.
“양근성지는 순교자들의 신앙이 배어 있는 한국교회의 요람인데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신앙의 뿌리를 찾는 작업인 양근성지 개발에 많은 신앙인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비닐하우스 성당에 눈길이 갔다. 한국교회가 시작된 자리인데…. 남부럽지 않게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한국교회의 또 다른 한 단면이다.
십자가 위 두 분 예수께 인사한 후 요람을 빠져 나왔다. 발걸음을 빨리했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았던 마을인 한감개를 거쳐 천진암으로 넘어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사진설명
▶아직 내부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성당과 성지 전경.
▶예수님 두분의 대형십자가. 한강과 성지를 각각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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