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는 10월 20일 오후 1시30분~5시30분 서울 가톨릭회관 7층에서 ‘한말·일제시대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천주교’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본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초를 다지는데 공헌한 파리외방전교회, 성 베네딕도회, 메리놀 외방전교회,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설립과 활동이 한국 천주교회사적 의의가 있다고 판단, 이번 심포지엄을 지상중계한다.
◎기조강연/ 한말·일제시대 한국교회와 선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재단이사장 염수정 주교
“일제 탄압에도 조선인 주교 탄생”
한국교회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난 1876년, 조선 정부는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한다. 특히 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은 선교사들의 권리와 치외법권을 보장해 줬다.
그 결과 1882년 서울에 종현본당(현 명동주교좌본당)이 설립됐고 몇 년 후, 교민조약이 체결돼 한국인에게도 신교의 자유가 인정됐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회는 순한글의 ‘경향신문’ 창간, 서울의 인현학교 설립, 고아원과 양로원 운영 등 선교활동과 함께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운동을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인해 한국은 국권을 일본에게 뺏기게 된다. 이 시기 교회의 평신도들은 1919년 3?1 운동 등 개인적으로 국권수호운동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국가의 모든 체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하고 종교계에도 협력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중 국내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구금했고 조선교회 교구장들을 일본인으로 대체시켜 나갔다. 하지만 서울대목구는 비밀리에 교황 사절을 통해 1942년 노기남 신부를 교구장에 임명, 최초의 조선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한다.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대목구의 분할
- 한국교회사연구소 조현범 박사
“방인사제 양성·순교사료 수집 기여”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대목구에서 사목활동과 방인사제 양성,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사료수집 활동 등을 했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박해시대 조선 천주교의 역사는 신자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함께 일군 것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신설되면서 조선 교회는 서울과 대구라는 양 대목구 체제로 변경됐다. 당시 조선대목구는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신자수와 더불어 신학생의 숫자도 증가했다. 이처럼 높은 증가율을 지켜보며 지도부는 교회의 지속적 발전을 낙관적으로 전망했을 것이다.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1910년부터 파리본부와 서한을 주고받았고 대목구 분할에 관한 논의를 계속한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을 3개의 대목구로 나누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또 충청도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곧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회람서신을 발송해 조선대목구 분할 교섭결과를 공식적으로 공포했다. 서한을 받은 선교사들은 즉시 투표에 참여했다. 뮈텔 주교는 자신에게 발송된 선교사들의 투표지를 모아 파리본부로 보냈다.
비오 10세 교황은 1911년 대구대목구를 설정하고 대목구장에 드망즈 주교를 임명했다. 이것은 한명의 주교가 조선 전역을 관할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롭게 조선으로 진출한 선교사들에게 전교지의 일부를 할양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그 처리 방식의 선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 후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증가율은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지만 방인 사제들의 수가 1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었다. 이같은 변화는 신자들의 영혼구원에 주력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큰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진출과 선교활동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
“한국교회 교육기관 설립 초석 마련”
한국 교회 최초의 남자수도회로서 1909년 진출한 선교 베네딕도회. 1905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전권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는 총독부를 조선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또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협회가 엄청난 재정능력과 인력으로 사회·문화적 지원을 통해 선교 활동에 몰두했고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교회는 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교사를 채용할 재정적 능력도,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고등 교육기관도 없었다.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학교설립’이라는 일차적 이유와 수도생활의 실현이 그 바탕인 것이다.
뮈텔 주교는 1908년 유럽으로 떠나 한국선교에 협력할 수 있는 교육수도회를 초청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포교성성에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를 추천한다.
당시 한국으로 진출하기 어려운 많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뮈텔 주교의 끊임없는 권유는 투표권 있는 수도회원들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따라서 베네딕도회는 1909년 선발대를 한국에 파견해 한국 가톨릭 교사양성기관 설립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베네딕도 회원들은 선교국가의 국민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가족정신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했다. 수사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회의 모토에 따라 농장과 과수원, 작업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기도하고 가르쳤으며 한국인 평수사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도 애썼다.
그들은 ▲숭신학교(교사양성기관) ▲숭공학교(직업학교) ▲소신·대신학교 등을 세웠다. 또 신자들을 전례에 활발히 참여시키기 위해 한국어 미사경본을 발간했으며 한국어로 하는 본당 성무일도도 실시했다. 이같은 베네딕도 회원들의 활동은 오늘날 한국교회 전례발전에 초석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수태 교수
“평신도 역할의 중요성 인식시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은 그 이전까지 천주교에 대해 갖고 있던 한국인들의 인식을 크게 바꿔주는 사건이었다. 개화기 이래 천주교는 프랑스의 종교로, 개신교는 미국의 종교로 구별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23년 평양지역에 신부들을 파견하면서 본격적 한국 선교활동을 펼친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목이세 신부가 교구장으로 활동하면서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기존 파리외방전교회와는 다른 모습의 선교정책을 보여준다.
1930년대 그들의 선교활동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일은 평신도 쇄신운동이다. 이들은 성직자가 들어오면서부터 평신도의 역할이 줄어든 한국교회를 보고 평신도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평양교구를 우선으로 가톨릭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1931년 가톨릭 운동을 전체문제로 확산시켜 나가며 1934년에는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평신도들에게 쇄신을 통해 세상의 잘못된 풍조에 과감하게 대항할 것을 요구했으며 평신도가 성직자를 후원, 협조하여 교회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할 사실은 문서선교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문서선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천주교를 알리고 평신도를 쇄신시키겠다는 뜻이다. 이들은 1934년 정기간행물인 ‘가톨릭연구강좌’를 간행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이들의 선교활동 중 특별한 것은 개신교와의 교류다. 목이세 신부는 개신교 학교를 방문하고 그들의 교세확장방법인 방문전도와 서적보급을 통한 조직화에도 주목했다. 이러한 목이세 신부의 행동은 개신교가 우세했던 평양교구 지역에서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머나먼 동쪽을 찾아온 선교사들
- 광주 가톨릭대학교 옥현진 신부
“민중과 함께 하며 복음 전파”
빛고을 광주에 복음화의 씨앗이 뿌려진 이후 파리 외방선교회 사제들을 통해 시작된 선교는 방인사제들과 골롬반 선교회 사제들을 통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한국교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생겨났지만 선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초창기 신앙의 뿌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이었던 반롯숨 추기경은 대구교구에서 전라남도 지역을 분리해 다른 선교 단체에 이양하도록 지시했다. 1931년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감목 대리구를 발표하고 김양홍 신부를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했다.
전라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고 2년이 지나며 드망즈 주교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한국인 신부들의 선교정신 결여와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이에 따라 골롬반 선교회가 광주대교구를 맡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한글 읽는 법을 가르쳐야했다. 아이들부터 시작해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탄압도 커져만 갔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골롬반 선교회 선교사들은 강원도 홍천에서 가택연금을 당한 채 지내야 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선교사를 모두 스파이로 간주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한국에는 30여 명의 골롬반 신부가 21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체포돼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가택연금을 당했다. 여행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의 병원 출입도 막아 중간에서 숨진 이도 있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순교와 그들의 피땀은 이 땅에 복음화의 빛을 가져왔다.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 선교를 해왔다는 비판도 있으나 광주에 들어와 활동하던 이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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