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믿기에 이곳은 끝 아닌 시작
이름 옆에 베드로, 소피아라는 세례명을 살포시 달고 두 사람이 나란히 화구로 들어간다. 이름 석자로 태어나 남들보다 세례명 하나를 더 붙이고 떠나는 중이다.
화장장 전광판 ‘화장중’, ‘대기중’에 번갈아 불이 들어오며 유족들의 슬픔도 한바탕 휘몰아치고 갔다.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성월, 화장장을 찾았다. 단풍이 곱게 물든 화장장 사이를 걸으며 기자도 조금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네 번째 현장이야기는 삶의 마지막 정거장, 화장장 이야기다.
# 전광판에 불켜지며 ‘화장중’
‘주인장, 그동안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보잘 것 없는 빈털터리 손님으로 왔다가 융숭한 대접을 받고 이제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세상에 내가 머물 곳은 그 어딘지 궁금하지만 내 도착하는 대로 안부 전하리다. 잘 있다고.’
화장장에 걸린 시 구절을 읽다보니 벌써 오전 10시30분. 시간이 됐다.
대기실에서 준비하던 유족들이 일어서서 밀차에 고인을 맡긴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도 이젠 더 이상 하지 못한다. 화장장 직원들이 고인을 재차 확인한 후 밀차를 밀고 화구로 움직였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리.”
유족으로 보이는 여성 하나가 대기실에서 불렀던 연도 노랫가락을 조용히 되삼킨다. 관이 화구로 들어갔다. 유리벽을 잡고 유족들이 동시에 통곡을 게워낸다. 화구의 문이 닫히며 직원들이 고인에게 거수경례를 한다. 그리고 뒤로 돌아 유족을 향해서도 이마에 손을 굳게 붙였다.
화장장의 전광판에 불이 켜지며 고인들의 이름 옆에 차례대로 화장시간이 떴다. ‘대기중’이라는 글자가 ‘화장중’으로 바뀌었다.
# 하얀 나비를 보다
직원 윤덕원(루피노, 인천교구 용현동본당)씨는 화장장에서 5년간 일한 베테랑이다.
깨끗이 차려입은 검은 넥타이와 정장, 회색모자가 눈에 띈다. 흰 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하는 손에서 세월과 관록이 느껴진다.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 고인과 가장 가까웠던 유족들도 유리벽을 통해서만 마지막 길을 봐야하니 이보다 복된 직업은 없다.
“일을 오래하다 보니 유골만 봐도 이젠 ‘고인이 어떻게 사셨구나’하고 알 정도가 됐어요. 자식을 위해 헌신하다 선하게 돌아가신 할머니 유골은 얼마나 깨끗하고 가볍던지….”
죽음에 대한 묵상뿐 아니라 자기반성과 삶에 대한 성찰은 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지, 진심으로 울어주는지를 매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구청을 통해 무연고자의 시신이 들어올 때는 관을 옮길 사람이 없어 운전사와 직원이 힘을 합쳐 운반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는 으레 유골함에 촛불을 켜고 묵념을 한다.
“편안하게 잘 가시고 가족을 꼭 찾길 바랄게요.”
하지만 그가 가장 마음이 아릴 때는 따로 있다. 어린 아이의 시신을 화장할 때다. 부모의 절절한 곡소리 탓도 있겠지만 안타깝고 애달픈 마음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하는 말이 아이를 화장할 때 겨울에도 흰나비를 보는 일이 많다는 거예요. 난 당연히 안 믿었지요. 그런데 얼마 전 나비를 봤지 뭐에요. 2월쯤인가. 흰 나비가 화장장 안에서 빙빙 돌더라고. 허, 참.”
삶에 치여 하루하루 전쟁하듯 살아가는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매일 ‘죽음’을 대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생의 끝자락에서 누구나 공평하게 받아들여야할 죽음이 삶에 던지는 메시지를 매일 곱씹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그의 자세가 경건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술은 이미 많이 줄였고, 욕심도 덜 부리려고 노력 중이에요. 욕심 부려서 다 가지고 살아봤자 나도 한줌 유골로 돌아갈 텐데….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올바르게 잘 살다 가야하겠구나’ 생각도 많이 하고요.”
# 죽음을 함께하는 자세
화장장에 놓인 유골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싼 향나무부터 오동나무, 자기, 옥, 주석, 자개, 값비싼 대리석 등. 성모송과 주의 기도가 새겨진 것도 있다.
우리가 삶의 마지막 정거장을 거쳐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떤 유골함에 담기게 될지는 중요치 않다. 어떤 모습으로 살았고 어떻게 죽느냐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
‘딩동~’
2시간쯤 흘렀을까. 화장이 끝났다는 알림과 함께 윤씨가 화구를 연다.
800~1200℃라는 화장온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주위는 엄숙하고 고요하다.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석판 위에 하얗게 태워진 유골만이 그대로 남았다.
윤씨가 ‘잘 가시라’는 속엣말을 전하며 유골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담았다. 가루가 된 나머지 유골들은 수수비로 깨끗하게 쓸어 담는다. 유가족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골함을 들고 수골실로 향했다.
아직 화장이 끝나지 않은 화구에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두 아들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유리벽 앞에 작은 십자고상과 아버지 사진이 놓여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유골함에 새겨진 이름을 엄지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어른다.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만의 초혼의식이다. 울다 지친 둘째 아들은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해본다.
다시 ‘딩동’.
수골실로 오라는 벨이 울렸다. 호명하는 번호에 따라 아버지의 유골 한줌을 손에 든다. 유골함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상주 뒤로 유족들이 차례대로 뒤따랐다.
취재를 마치고 화장장을 나서는 길. 이름과 세례명 옆에 ‘하늘나라 가소서’라고 새겨진 묘비가 환한 햇살을 받고 서 있다. 오늘 아침, 화장장에서 본 ‘다음 세상에 내가 머물 곳이 어딘지 궁금하다’는 시 구절에 엄숙히 답을 달아본다.
※취재협조 인천 가족공원 장묘문화사업단
사진설명
▶5년간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해온 ‘마지막 배웅자’ 윤덕원씨가 고인을 향해 거수경례한 후, 유족들에게도 경례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인천 가족공원 장묘문화사업단 묘지에 ‘하늘나라 가소서’라고 새겨진 묘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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