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딛고 화해·용서의 여정 오르다
사형수 가족과 피해자 가족이 모여 아픔을 함께 하고 사형을 반대하는 일이 가능할까?
정답은 가능하다. 1993년 미국인 빌 펠케가 마련한 사형수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모임, ‘희망여행’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위원장 이영우 신부)는 10월 12일~25일 희망여행에 참가했다. 미국 텍사스에서 진행된 2주간의 일정에서 그들은 놀라운 ‘희망’을 체험했다. 아직까지 사형이 집행되고 있으며 370명이라는 숫자의 사형수를 두고 있는 텍사스. 그곳으로 희망을 찾아 떠난 교정사목위원회의 감동을 체험해본다.
어느 누구도 죽은 자를 대신해 말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죽은 자가 품었던 꿈과 희망을 대신 이뤄줄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이것을 잊지 않도록 투쟁해 왔다. 중립이라는 것은 억압자를 도울 뿐, 결코 피해자를 도울 수 없다. 침묵은 고통을 조장할 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책 ‘희망여행’ 중에서).
위로의 힘은 컸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상처를 내놓고 울고, 다시금 ‘희망’을 찾아가기에 이번 희망여행은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다.
특히 교정사목위원회와 함께 참여한 고정원(루치아노·64)씨의 사연은 국경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을 울리고 용기에 박수를 보내게 만들었다. 고씨는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으로 노모와 아내, 4대 독자를 한꺼번에 잃은 사람이다.
사형에 반대한다는 마음과 동병상련의 애수를 가진 것만으로도 이들은 첫날부터 하나가 됐다. 텍사스 휴스턴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함께 나누며 희망을 만들어갔다.
13일. 올해 5월 가톨릭신문의 초청으로 방한했던 헬렌 프리진 수녀의 강연과 가수 낸시 그리프스의 공연이 라이스 대학에서 열렸다. 총 200여 명이 참석한 이 공연에서 고정원씨가 ‘한국에서 온 화해와 용서의 걸음을 걷는 사람’으로 소개됐다.
희망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며 절절하다. 우선 14년간 희망여행을 이끌어 온 빌 펠케. 할머니 루스 베르케가 18세 미만 소녀들에 의해 살해되자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주범인 폴라(15)에게 사형이 선고된 이후에도 그의 증오는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재판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던 폴라의 할아버지를 본 후 심경에 변화가 생겨 현재는 그를 용서하고 감형을 위해 운동을 벌이고 있다.
피해자 유가족인 동시에 사형수가족이 되어버린 사람도 있다. 씨씨 맥위의 딸 조이스는 1980년 사위로부터 살해당한다. 20년이 지난 후에는 아들 제리가 마약 비용을 위해 편의점에서 점원을 살인해 사형이 집행됐다. 기구한 그의 사연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어떤 입장에도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7살 딸이 납치, 살해됐지만 범인을 용서한 마리에타 레인은 “제 딸은 아름답고 기쁜 선물이었기 때문에 아이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딸의 삶에서 좋았던 부분을 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행려인 봉사활동을 하다 정신이상자에게 동생을 잃고도 그의 뜻을 이어받아 봉사를 계속하는 형, 대학생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가스실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진범이 자백해 4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 폭탄테러로 딸을 잃고도 범인을 용서하고 그 아버지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 등 다양하다.
참가자들은 휴스턴 지역 교회 7~8군데에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사형반대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고정원씨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들은 또 인근 고등학교, 대학에서도 강연을 이어나갔으며 17일에는 헌츠빌 월스 교도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사형반대시위도 벌였다. 인근 샘 휴스턴 대학의 학생들도 참여해 한마음이 됐다.
이후 교정사목위원회는 특색있는 종교 프로그램을 가진 벤스 교도소 등 10개의 미국 교정기관들을 견학했다.
교정사목위원회 안미란 사무국장은 “피해자 가족들은 그 아픔을 맘껏 풀어내는 공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며 “특히 고정원 어르신께서 아픔을 내어놓고 그들과 함께 화해와 용서의 걸음을 걷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이후 올해로 10년째 사형집행을 유예해오고 있다. 따라서 오는 12월 29일까지 사형집행이 없으면 국제 엠네스티의 기준에 따라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되는 우리나라가 화해와 용서의 걸음을 걷는 이들의 ‘희망’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희망여행’ 참가한 서울 교정사목위원장 이영우 신부
“고통 나누며 희망 만드는 자리”
“사형수 가족과 피해자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이 우리 눈에는 불가능해 보이지요. 하지만 실현 가능했습니다.”
희망여행에 참가한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영우 신부는 이번 여행을 통해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자신의 아픔만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 입장에 서서 배려하며 공유했다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줄 알았던 아름다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신부는 “그들은 함께 눈물 흘리며 아픔을 쓰다듬을 줄 알았고 가족을 잃었다는 상처 때문에 또 다른 죽음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며 “이들의 희망은 ‘사형폐지’라는 하나의 목표뿐”이라고 말했다.
책 ‘희망여행(2006)’을 우연히 접한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는 한국에서도 피해자모임을 시작할 것을 계획했다. 실제로 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피해자가족모임을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꾸준히 4가족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미국의 ‘희망여행’과 같이 사형수 가족들은 참석하지 못하고 있어 아쉬운 점이 많다.
그는 “한국에서는 사형수 가족이 죄인 취급을 받고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많다”며 “여기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하는 희망여행의 근본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신부는 ‘신앙’에서 그 힘을 찾는다. 참가자들은 가톨릭을 비롯해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가치들을 만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는 죽음을 죽음으로 응수하는 대립상황에서 벗어나 밤마다 눈물짓고 얼싸안으며 힘들지만 ‘희망’을 찾아갔던 이들에게 많은 부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들은 각자의 아픔을 당당히 공론화시키고 고백하며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이신부는 “희망여행에 참여하기 위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찾아온다는 자체가 놀라웠다”며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고정원 어르신과 미국의 참가자들이 함께 눈물짓는 것을 보고 진한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미국의 사형수 가족과 피해자 가족 모임인 ‘희망여행’을 찾은 서울 교정사목위 위원들. 그들 각자의 기구한 사연이 애달프다.
▶고정원씨가 또다른 희망여행 참가자 씨씨와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 사형 반대 의지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것만으로도 이들은 하나가 됐다.
▶'희망여행' 참가자들이 서울 교정사목위 위원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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