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교회에 진 빚 갚은 것 같아 홀가분”
존경스러웠고, 안쓰러웠고, 유쾌했다. 10월의 마지막 날 오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사제관에서 백민관 신부를 만난 느낌은 그랬다.
백민관 신부는 자타가 인정하는 서울 대신학교의 산 증인이다. 1952년 사제품을 받은 뒤 유학 생활과 2년의 본당 경력을 제외하고는 사제 생활 전부를 신학교 교수로 헌신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올 법 듯한 ‘아버지를 가르치고, 아들도 가르치고, 손자까지 가르친 스승’이 바로 백 신부다.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4시간씩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친다.
백민관 신부가 ‘백과사전-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가톨릭대학교출판부/18만원)을 냈다. 백 신부 개인적으로는 15년이란 긴 세월이 투자된 필생의 역작이자, 일생의 마지막 저술이다. 한 손으로는 들기 힘든 3권 분량에 무려 3000여 쪽이 넘는다.
사제관에서 만난 백신부는 “몸이 전부 다 망가지기 전에 사전 편찬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말부터 꺼냈다.
“후학들을 위해 우리말로 된 가톨릭 백과사전을 꼭 내고 싶었습니다. 평생을 신부로 살며 행복했는데, 하느님과 교회에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 뿐이었죠. 이제야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내로라하는 연구자와 박사들이 모여, 최신식 편집장비와 어마어마한 후원금을 얻고도 힘든 일이 사전을 펴내는 일이다. 백 신부는 원고 한자 한자를 손으로 써내려갔고, 최근에 들어서야 독수리 타법을 익혀 워드를 사용했다고 한다. 신학교 학장을 두 번씩이나 역임하느라 2년 전에야 겨우 1차 탈고를 마칠 수 있었고, 편집의 일관성을 위해 모든 작업은 혼자서 했다.
그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영어, 일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번 백과사전 편찬 작업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외국 지명과 인명 등의 우리말 표기였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교회 용어와 일반 사전의 표기가 다릅디다. 발음이 전부 제각각이죠. 좀 정리할 만하면 새로 개정된 ‘외국어표기법’이 또 불쑥 튀어나오고. 하하. 그래서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백신부가 선택한 방법. 표제어는 영문으로 했고, 외국어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을 위해서는 우리말 표제어 색인을 부록으로 따로 실었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백과사전 추천의 글에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번 대사전을 완성하신 노사제의 공로에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박수를 드린다”고, 가톨릭대 총장 임병헌 신부는 “참고할 만한 사전이 드물어 늘 아쉬웠던 차에 보물창고 같은 신부님의 백과사전이 출간된 것은 가뭄에 단비보다 더 반가운 일”이라고 적었다.
상처 없는 영광이 있을까. 백신부는 작업을 완성하면서 한쪽 눈을 잃었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눈에 바이러스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책을 읽지 못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남은 하나는 고장 나지 않게 아껴쓰고 싶단다.
건강은 아직 괜찮은 편이다. 하루에 1만5000보 이상 걷는다. 신학교 마당과 운동장으로는 모자라 청계천도 걷고, 성북천도 걷는다고 했다.
“젊은 시절 제 별명이 ‘동키하테’였습니다. 겨울엔 스키, 여름엔 테니스란 뜻이죠. 이젠 나이 들어 그렇게는 못하지만, ‘걷기 운동’도 꽤 훌륭한 몸 관리 방법이랍니다”
인터뷰가 끝나 갈 무렵 그의 ‘욕심 없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제관을 둘러보았다. 뭐 하나 값나가 보이는 물건이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사방의 벽은 책장으로 둘러 싸여 도대체 출처를 알 수 없어 보이는 빛바랜 누런 책들이 가득했다. 이런 소박한 풍경 속에서 백 신부는 오히려 풍요로워 보인다.
지난 2002년 백 신부의 금경축 행사에서 한 신학생이 그에게 ‘신부님은 깜찍한 천재이십니다’라고 표현했단다. 이런 깜찍하고, 천재이며, 건강한 교수님께 오늘도 라틴어 수업을 듣는 서울대교구 신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올해로 팔순을 맞은 백민관 신부는 여전히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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