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홋불 세상에 퍼뜨린‘고난의 밀사’ 만나다
그리스 신화에 헤르메스가 있고, 한국 근대사에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 소식을 전하고 숨진 병사가 있다면 한국교회에는 윤유일(바오로, 1760∼1795)이 있다.
군(軍) 용어로는 ‘전령’이고, 성경 용어를 빌리면 ‘종’이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는 이 윤유일을 ‘고난의 밀사’라고 부른다. 한국교회의 초창기, 선교사 없는 상황에서 당시 조선과 중국교회 교류의 ‘발’ 역할을 한 인물이 윤유일이다. 세례명 바오로를 쏙 빼어 닮은 삶. ‘천주교 신자는 자신의 세례명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윤유일에서 만큼은 틀린 말이 아니다.
어농성지(전담 이건복 신부)는 이 윤유일을 현양하는 성지다. 도자기와 쌀의 고장 경기도 이천에서 지척이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3리 322-4. 이천터미널에서 약 11km 떨어져 있는데, 도보로는 약 5시간 정도 걸린다. 불과 2년전 만해도 황무지이던 이곳에, 성지 전담 이건복 신부 의 노력으로 이제는 제법 성지의 틀을 갖추고 있다(그러나 성당은 아직 조립식 건물이다). 최근 성가정미사 및 청년미사 등에 서울과 경기 일원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가을의 막바지에 그 어농성지에 섰다. 윤유일에 대한 자료가 빼곡한 취재수첩을 읽고 또 읽어서일까. 마치 1789년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윤유일은 그해 12월 찬 바람을 맞으며 북경 천안문 앞에 서 있다. 윤유일은 자신에게 신앙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쳐 준 스승 권일신이 조선을 출발하기에 앞서 써준 시(詩)를 떠올린다.
“한강포에서 스승이 제자를 보내니, 때는 중동절이라 이미 눈발은 날리고, 제자의 노정을 생각하니 스승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네, 그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가, 막막한 산천을 넘고 천하의 제일관을 지나야 한다네. … 만주벌판 한없이 눈이 날린다 하더라도, 찬바람이 겹옷 안으로 스며든다 하더라도, 부디 중도에 병 들지 않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북경 선교사들로부터 구원의 말씀 전해 오기를 바라네”(이하 인용문 차기진 박사 역).
북경에 온 목적은 달성해야 했다. 윤유일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북당(당시 북경에는 성당이 남당과 북당 두 곳 있었다)의 문을 두드린다. 위험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긴박한 상황. 문지기가 나타나자 윤유일은 급히 종이 조각에 흑연으로 글을 써서 보인다.
“저는 조선에서 온 천주교 신자입니다. 세례명은 바오로이고, 이승훈 베드로의 제자입니다.”
북경은 놀라움에 휩싸인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베푼 후 4년간 조선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조선에서 스스로 밀사를 파견해 온 것이다.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당시의 놀라움을 편지에 담아 이웃교구 주교에게 알린다.
“조선 교우 윤바오로가 북경에 온 것을 알게 된 이곳 천주교회의 모든 이들은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누구를 북경에 파견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 기쁨은 더욱 컸습니다. 이제껏 간 한 사람의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는 극동의 나라, 그 나라에 지금 기적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북경교회는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뻤습니다.”
윤유일은 북경의 가르침을 받고 많은 성물을 선물로 받아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후 두 차례나 더 북경을 왕래하며 세례와 견진을 받고(1790년, 한국교회 최초 견진자),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서 체포되었을 때 입국에 도움을 준 지황, 최인길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그 해 6월 순교한다. 동생 윤유오와 사촌동생 윤점혜, 윤운혜도 윤유일의 뒤를 따른다.
무엇이 만주벌판의 삭풍을 견딜 수 있게 했을까. 어떤 섭리가 고난의 밀사 역할을 아무런 불평없이 수행해 낼 수 있게 했을까.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윤유일의 신앙과 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편안한 신앙생활도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성지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한 구절을 읽었다.
“우리의 밀사 윤유일은 한겨울의 3000여 리 길을 가면서 매우 고생스러운, 진정한 위험을 겪어야만 했다. 그 일행 중에 여러 사람들이 도중에 병으로 쓰러지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념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던 젊은 학자 윤유일은 이 낯선 여행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 만일 그에게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밀사’라고 하면 가장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된다. 마음과 몸이 모두 건강해야 하고, 게다가 ‘신앙의 밀사’라면 신앙도 그 누구보다도 돈독해야 한다. 묵숨까지 바칠 수 있는 용기를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어농성지에서 묵상한 윤유일은 그 ‘밀사’ 이상의 ‘밀사’였다.
어농성지는
어농성지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다 순교한 한국교회 최초의 밀사 윤유일, 동료 밀사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한 성지다.
또한 1801년 순교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뱌고보), 사촌여동생 윤점혜(아가타) 동정 순교자, 윤운혜(루치아), 정광수(바르나바) 순교자, 또 이들과 함께 주신부를 도왔던 강완숙(골룸바)를 위해서도 현양운동을 펴고 있다. 이 9명의 순교자는 그 성덕을 인정받아 교황청에 의해‘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됐고, 현재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순례 문의 031-636-4061
사진설명
▶성지 입구의 나무십자가
▶성지마당에 재현한 형틀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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