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의 순교터에 낙엽비 내리고…
전어만 ‘가을 전어’가 아니다. 성지(聖地)도 ‘가을 성지’가 제격이다.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날씨.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발로 툭툭 밀어 차며 걷다보면 마음과 몸, 가슴이 모두 함께 기뻐한다.
신앙에 목숨 바친 300여 순교자 넋 서려
자가용 도움을 받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남한산성 성지에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로 나와 9번 버스를 타면 약 20~30분이면 성지 코앞에 내릴 수 있다. 또 간단한 등산을 하고 싶다면 지하철 5호선을 이용, 마천 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남한산성 방향 등산로를 이용할 수 있다. 1시간이면 남한산성 서문에 도착한다.
낙엽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남한산성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영(靈)이 오버랩 됐다. 한강 이북 순교터로 절두산, 새남터, 당고개를 꼽을 수 있다면 한강 이남에선 대전교구 해미성지와 함께 단연 남한산성이 손꼽힌다.
신유(1801), 기해(1839), 병인박해(1866)를 통해 300여 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양근, 천진암, 구산, 어농성지와 함께 남한산성 성지가 수원교구의 맨 앞줄에 위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남산산성 성지에는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81)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도 내려오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참혹했다. 칼로 목을 베는 참수(斬首), 목을 메어 죽이는 교수(絞首),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이 이곳에서 시행됐다. 병인 박해 때는 너무 많은 신자들이 한꺼번에 잡혀오자 형을 집행하는 군졸들도 피를 보는 것이 힘들어, 한지를 얼굴에 덮어 물 뿌려 질식사 시키는 백지사(白紙死)를 시행했을 정도였다.
남한산성 성지는 이처럼 엄청난 수의 순교자가 태어나고 그만큼 풍부한 영성을 간직한 성지지만 신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소위 유명한 순교자가 없는 탓이었다. 신자들의 발걸음이 뜸한 이유도 알 수 있을 듯했다.
남한산성 성지 전담 박경민 신부는 “절두산, 새남터 등에선 김대건 신부님 등 많은 잘 알려진 인물들이 순교했지만, 남한산성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민초들의 순교 피가 서려있는 곳”이라며 “이름 없는 신앙을 살아가는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에게 깊은 감흥을 주는 성지”라고 말했다.
영혼의 안식처… 죽음을 묵상한다
현재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인물로 행적이 알려지고 있는 순교자는 대략 30여 명. 주요 인물로는 1801년 남한산성에서 참수당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와, 김성우 성인의 아우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김성희 암브로시오 등이 있다.
남한산성 성지는 이 중 한덕운 토마스에 주목하고 있다. 한덕운은 참수당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다 적발돼 순교한 인물. 그래서 남한산성 성지는 ‘영혼의 안식처 성지’로,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성지다.
박신부는 “남한산성 성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성지이자, 죽음을 묵상할 수 있는 성지”라며 “성지를 찾는 이들이 영혼의 안식을 찾고,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위해 편안히 기도할 수 있도록 많은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이 성지에 오르고 있었다. 뒤따라 보았더니 십자가의 길 제 4처 앞에 한참동안 서 있다. 지나는 길에 천주교 순교성지 간판이 보여 호기심에 들렀다고 했다.
“천주교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또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님은 이냐시오 영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야기를 멈추고 성지 마당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는 신자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조용하다. 낙엽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 성지 미사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단 주일은 오후 2시. 성시간은 매주 목요일 밤 12~3시. 떼제미사는 매월 첫 금요일 저녁 8시.
※문의 031-749-8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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