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이용하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지하철 5호선 명일역에서 강일 방향으로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성지 500m 앞이다. 또 경기도 하남에선 신장 시장 LG마트에서 3번 마을버스를 타고 구산식품 앞에서 내리면 된다. 하지만 걷기로 했다. 순교 성인들의 삶이 바로 ‘길 위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왔다. 배낭이 몸에 착 붙도록 어깨 끈을 바짝 조였다. 손으로 묵주를 매만지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위에 대단위 아파트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성우 성인 유해 모셔
구산성지(전담 정종득 신부,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10번지)에 이르는 길은 과거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103위 중 한 분인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의 묘가 있는 곳. 과거를 묵상했다.
1830년, 신앙의 빛이 구산에 스며들어 온다. 김성우 성인을 비롯한 그 동생 문집(베드로), 만집(아우구스티노) 등 일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는다. 이어 구산 일대는 이들 형제들에 의해 교우촌이 됐고, 특히 김성우는 서울 동부지역 및 경기도 광주지역 회장으로 활동했다. 기쁨 속에서 신앙을 전한지 10년. 하지만 이 환희의 신비는 고통의 신비로 이어진다. 김성우 성인이 1839년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게 된 것. 하지만 성인은 배교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옥에서 복음전파에 나서 죄수 2명을 입교시킨다.
고통의 신비 뒤에는 영광의 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1841년 4월 29일 당시 47세의 성인은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형을 당했다. 성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에 의해 현 구산성지 내 위치에 안장됐다.
피의 순교는 계속 이어진다. 성인의 동생 김만집이 44세 나이로 그해 순교하였고, 문집도 18년간 옥살이를 하다 참수당했다.
성인의 외아들 성희와 김만집의 차남인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도 1868년 참수형을 당했다. 구산에서 태어난 머슴 심칠여(아우구스티노)가 매를 맞아 숨진 것도 1868년이다. 참으로 많은 피가 있었다.
순교자 후손이 지켜온 ‘신앙의 고향’
성지 앞에 섰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50분을 걸었다. 성모님이 먼저 반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독특한 모습이다. 루르드 성모님도, 파티마 성모님도, 과달루페 성모님도 아니다. ‘어떤 사연의 성모님일까.’ 안내문을 읽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이곳 성모상은 성모님께 특별한 신심을 가졌던, 구산성지 초대 주임 고 길홍균(이냐시오) 신부(재임 1979~1984)가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길신부는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인 고 김세중(프란치스코) 화백에게 작품을 의뢰하였고, 김화백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이 성모상을 제작하였다. 이 성모상은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구산성지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성모상이다.”
성모상 주위로 회향목이 심어져 있다. 과거 순교 성인들이 묵주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그 나무다. 성지 마당으로 들어서면 너른 잔디밭과 쉼터가 보인다. 오른쪽 사립문을 지나면 김성우 성인의 묘가 있고, 그 옆에 성당이 있다. 성당에서 정종득 신부가 반갑게 맞는다. 정신부는 “구산성지는 103위 성인 중 한분이신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무덤을 비롯해 여덟 분의 순교자 자취가 남아있는 거룩한 땅”이라며 “이곳은 성인과 순교자가 탄생하여 생활하신 곳이며 그분들을 통해 교우촌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성인과 순교자의 후손들이 지켜온 신앙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수원교회사연구소 소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정신부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외국인 및 신자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한국교회 영성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영성 마을을 건립하고, 관람 자체로 피정을 할 수 있는 영성 박물관도 세우고 싶어했다. 또 영혼을 짠하게 만드는 생활성가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정신부는 성지를 찾는 신자들에게 늘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준다. 4시간 가까이 정신부와 이야기 했다. ‘참’ 행복했다. 구산성지는 은총의 성지로 불린다. 은총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 순례 문의 031-792-8540 ■ 성지 미사 매일(월요일 제외) 오전 11시. 화요일은 순교자현양미사, 수요일은 성가정미사, 목요일은 위령미사, 금요일은 예수성심미사, 토요일은 성모신심미사로 봉헌된다. 또 매월 첫날은 후원 회원을 위한 생미사를, 마지막 날은 회원들의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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