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 나누려 까만천사 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시인, ‘너에게 묻는다’ 중).
연탄이 가득 실린 트럭을 보자마자 누군가 묵직한 목소리로 시한구절을 읊어냈다.
그리고 연신 이어지는 소리들.
“이 연탄이 오늘 저녁부터 개성 곳곳을 데울 땔감이야. 빨리 움직이자고.”
“트럭 한 대에 6250장이라고? 별거 아니군. 자, 얼른 내리고 한 대 더~”
“1000장 쌓고 허리 한번 펴기다. 알았지?”
11월 마지막날, 북한 개성 봉동역 광장에는 연탄이 수북히 쌓여갔다. 개성 시민들에게 전달할 5만장의 연탄과 2500장의 번개탄. 배달부로 나선 주인공은 의정부교구 민족화해 사제모임(대표 이은형 신부)이었다.
새카만 바지, 새카만 앞치마, 새카만 토시까지 갖춘 18명의 사제들.
호기롭게 나섰지만 금새 구슬땀을 흘려낸다. 연탄 무게를 너무 얕잡아본 것이었을까. 아뿔싸, 연탄 한 장에 3kg이 조금 넘는단다.
트럭에서 몇장 내리지 않아 허리가 끊어질 듯 뻐근해왔다. 선배사제들이 쉼없이 연탄을 던지는 통에 ‘나하나쯤’ 하고 숨을 고를 수도 없었다. 아직 덜 마른터라 무게감이 더 큰 연탄에서는 김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하지만 팔에 힘이 빠지고 어깨가 쑤실수록 입가의 미소는 짙어져갔다.
북한과 맞닿은 지역을 관할하는 의정부교구는 분단의 상처를 보듬는 일을 교구의 큰 소명으로 인식한다. 특히 교구 내 각 지역별로 20분에서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도시 개성을 통해 이웃의 정을 나누고자 한다. 우선은 (사)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과 연대해 연탄 지원에 나섰다. 이날 연탄배달에는 북한 주민 50여 명도 함께 했다.
사제단이 지난 10월에 이어 두 번째 연탄배달을 펼친 자리다. 처음엔 어색한 표정으로 사제들을 맞이하던 북한주민들. 그러나 그 모습도 잠시, 그간의 선입견은 함께 흘린 땀방울에 자연스레 녹아갔다. 대신 사제들의 따스한 마음과 연탄재를 뒤집어쓴 사제들을 위해 찬물을 데워 나르는 북한 아낙네의 마음 씀씀이가 채워졌다.
민족화해 사제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은형 신부는 “북한은 더 이상 ‘가깝고도 먼 이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 손만 내밀면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라며 “앞으로는 평신도들이 직접 봉사활동에 참여해 서로 왜곡된 선입견을 없애고 이웃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도울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탄도 교구민들이 알음알음 모은 후원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연말연시면 으레 펼치는 생색내기 행사가 아니다. ‘신앙인’에게는 한켠에서 들끓는 퍼주기식 논쟁도 무의미하다는 것이 사제단의 설명이다.
이번에 지원된 연탄으로는 개성의 일부 마을 주민들이 ‘아껴아껴’ 한겨울의 추위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 열기가 사그라들기 전에 다시금 남북이 손을 맞잡을 시간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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