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처럼 소생을 갈망한 반 고흐
■ 김현화 교수는
김현화(베로니카) 교수는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세기 미술사’ ‘현대미술 골고다의 초대’ ‘경계없는 현대미술’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낸 바 있다.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 (요한 11, 38~44).
화분과 더불어 거실의 장식품이 된 TV가 가끔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깊은 정이나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방금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TV에서 권투선수 최요삼씨가 끝내 뇌사판정을 받고 그가 사랑하는 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주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시니 라자로가 살아나 벌떡 일어난 것처럼 그도 그렇게 완치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그림을 그린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역시 ‘라자로의 기적’처럼 자신을 괴롭힌 정신병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라자로의 소생’은 렘브란트 그림의 개작이지만 반 고흐는 라자로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묘사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갈구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반 고흐의 가난과 질병, 좌절은 삶 속에서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반 고흐는 라자로처럼 자신도 현실적 고통을 이겨내고 소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절망의 짓눌림을 감당하지 못했던 그는 1890년 7월 27일 자신의 가슴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겨 그 이틀 뒤 37세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반 고흐는 광기, 고독, 가난, 불행, 비극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네덜란드의 중, 상류층의 지적이고 교양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숙부 중 셋이 미술계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화상(畵商)이었다.
반 고흐는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런던 구필 화랑에서 잠시 일한 후 목회자의 꿈을 키우고 고향에서 신학교 입학시험에 도전했지만 낙방했다.
게다가 교단의 특별허락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전도사가 되어 ‘보리나주’ 탄광촌으로 떠났지만 여기에서의 생활은 허위와 위선에 가득 찬 성직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탄광촌을 떠나면서 하느님을 가슴에 묻고 목회자의 꿈도 버렸다.
반 고흐는 새로운 삶을 예술에 정착시키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기 위해 앤트워프(Antwerp)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그러나 미술의 규범, 법칙을 강조하는 학교 수업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를 ‘불멸의 화가’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라자로의 소생’의 밝은 색채, 자유로운 붓 터치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이다. 인상주의는 19세기 중엽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캔버스와 물감을 야외로 들고 나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인상을 담는다.
즉 같은 장소라도 아침에 보는 인상, 저녁에 보는 인상이 달라질 것이고, 이같이 대기의 빛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의 인상을 화폭에 담는다. 그러나 반 고흐는 ‘눈의 인상’보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즉흥적인 감동과 열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반 고흐는 화창한 햇빛 아래에서 온 몸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에너지와 생기를 화폭에 담고자 남프랑스의 아를르(Arles)로 떠났다. 특히 그는 이곳에서 화가들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파리에서 만난 고갱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고갱은 아를르에서의 생활을 지루하게 여겼고 무엇보다 그의 지나친 열정과 정서불안에 질려 두 달 만에 떠날 것을 결심한다. 반 고흐는 떠나겠다는 친구의 선언을 받아들일 수도 인내할 수도 없었다.
그의 섭섭함과 슬픔, 절망은 결국 그를 광기로 몰고 갔다. 반 고흐는 마음의 고독과 슬픔, 허전함 그리고 배신감을 견디지 못해 울부짖다가 귀를 자르는 자해를 저지르며 발작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정신병이라는 굴레에 빠져 요양원에 드나들게 되었다.
반 고흐는 요양원에서 오히려 회화 작업에 더욱 몰두하였고 성경과 그리스도를 다시 찾았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끝없이 샘솟는 회화적 영감을 제공받으면서 ‘라자로의 소생’ 이외에 ‘천사’, ‘피에타’, ‘착한 사마리아 사람’ 등 여러 점의 종교화를 그렸다.
그는 다시 소생하고 싶었고, ‘씨 뿌리는 사람’ 등을 그리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광기는 반 고흐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다. 가끔씩 찾아오는 병의 치유에 대한 불확실과 불안, 절망은 광기의 횡포를 더욱 부채질 하였다.
결국 그는 라자로처럼 소생하지 못하고 새로운 안식처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부활하였고, 그의 이름 ‘빈센트 반 고흐’는 미술사에 둥지를 마련하고 영원한 삶을 향유하고 있다.
해설 Tip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을 감상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옆에 자리잡은 ‘반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 Amsterdam)이다. 고흐의 작품도 여느 유명 미술품들과 마찬가지로 세계 각지의 미술관에 전시돼 있지만, 연대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이곳 뿐이다.
1973년 문을 연 반 고흐 미술관에서는 고흐의 유화 200여점과 드로잉 500여점, 스케치북, 편지, 고흐가 수집한 일본 판화 등을 만날 수 있다. 또 미술관은 19세기 유럽미술의 흐름과 예술환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여타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고흐와 관련된 자료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도서관도 운영한다.
반 고흐의 작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직접 만나볼 수 있어 관심을 모은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전에서는 비록 극히 일부의 작품이긴 하지만 시기별로 배치된 작품을 통해 고흐의 작품세계를 정리해 볼 수 있다.
3월 16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에서는 고흐의 대표작 자화상과 반 고흐 미술관 등에서 가져 온 유화작품 45점을 선보인다.
작품설명
'라자로의 소생'. 반 고흐, 1890, 캔버스에 유채, 50×65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