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에 맞서 참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10돌 맞은 예수살이공동체 초청으로 방한
“평화헌법 수호 위한 피스9 운동 동참을”
우리나라에는 늘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자리해온 일본은 두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세계 역사를 통해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서왔다. 때로는 교류와 우러름의 대상으로, 때로는 수탈과 배제의 대상으로.
두 나라 관계를 수식하는 데 종종 쓰이는 ‘가깝고도 먼’이란 표현은 그만큼 긴밀하면서도 애증이 동시에 녹아있는 두 이웃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이후 두 나라는 세계화로 표방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좋은 이웃으로 난 길을 향해서는 그리 많이 나아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전쟁의 세기’라 불리는 20세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인류에게 두 나라의 발걸음은 새로운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근래 몇 년 동안 두 나라 관계에 있어 시금석으로 떠오른 화두 가운데 하나가 ‘평화헌법’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이 1946년 11월에 공포한 헌법 9조를 일컫는 평화헌법을 둘러싼 문제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오사카대교구 마츠우라 고로(松浦悟郞, 56) 주교가 3월 7일부터 닷새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 회장이기도 한 마츠우라 주교의 방한은 한국인들의 뇌리 속 깊숙이 침잠해있던 ‘이웃’, 나아가 ‘형제’라는 의식을 흔들어 깨워 놓았다.
“평화헌법은 일본만의 헌법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귀중한 보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이 지닌 평화의 정신을 세계로 확산해 진정한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복음적 대안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는 예수살이공동체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마츠우라 주교는 평화헌법에 물음표를 던지는 한국 신자들의 반향에 이 법이 일본이라는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 법임을 수차례나 강조했다.
“평화헌법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닌 법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헌법 제정의 역사적 맥락을 환기하고 평화헌법의 인류사적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모든 인류가 평화를 자신의 문제로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은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전 세계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평화를 추구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뜻을 담고 있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 내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것도 이번 마츠우라 주교의 방한을 재촉한 면이 없지 않다. 실제 일본에서는 지난해 평화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수순으로, 헌법 개정을 발의하고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투표법이 확정돼 헌법 시행 60년 만에 개헌의 길이 열려 우익을 중심으로 개헌안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아시아지역에서는 평화헌법의 의미는 물론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멀지 않은 역사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망각’과 ‘아픔’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마츠우라 주교가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 내의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해 지난 2002년부터 제창해 펼쳐오고 있는 ‘피스(peace) 9’ 운동이 일본은 물론 아시아인들의 눈길을 모으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피스 9’ 운동은 세계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군사력을 없애나가자는 정신을 확산시켜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갈구하셨던 참다운 평화를 일구자는 것입니다.”
마츠우라 주교를 비롯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등 일본의 뜻있는 이들이 평화헌법에 그토록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비록 현재도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군사력을 지니고 있지만 명목상으로는 군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규제가 있고 군사무기를 만들어 팔 수 없다.
또 자위대가 해외에 파견되더라도 총을 쏠 수가 없다. 하지만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자위대가 군이 되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일본이 자랑하는 첨단 기술들이 군수산업에 집약되고 이는 곧 일본의 산업구조와 경제체제의 변화를 불러와 아시아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침체와 위기로까지 불리던 일본 시민사회운동에 ‘피스 9’ 운동이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현재까지 볼 수 없었던 움직임이 ‘피스 9’ 운동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시민운동이 정부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이었다면 ‘피스 9’ 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피스 9’ 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이래 ‘낡았다’는 이유나 이른바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을 목적으로, 70%에 이르던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일본 국민들의 목소리가 몇 년 새 40%선까지 내려간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결과 이 운동이 제창된 지 5년여 만에 평화헌법 수호에 뜻을 함께하고 나선 ‘피스 9’ 운동 단체들이 일본에만 1060여개 그룹에 4000명을 넘어섰다. 멀리 남미와 한국에서도 ‘피스 9’ 운동에 동참하는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어 마츠우라 주교의 걸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요시다 총리가 ‘군사력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어서 일본을 지켜야 한다’고 했음에도 일본이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왔는가 하는 점에 많은 일본인들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마츠우라 주교는 자신들의 걸음이 바로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 나가는 길임을 분명히 했다.
“평화헌법은 평화를 향한 인류의 오랜 소망을 담은 권리 장전이나 다름없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희구하는 민중들의 염원이 반영되어 있는 평화헌법을 지키는 일에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 일본 헌법 제9조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 발동인 전쟁,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 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외의 전력은, 이것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마츠우라 고로 주교는
1952년에 태어난 마츠우라 고로 주교는 죠치(上智)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1981년 오사카교구 사제로 서품됐다. 1986년부터 재일 한국인, 조선인 외국인등록법 문제에 관여하며 대외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그는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자위대 파견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다. 1999년 오사카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마츠우라 주교는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 회장으로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피스 9’ 운동을 제창해 이끌어오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