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도 되고 싶었다가, 운동선수도 되고 싶었다가…. 성적도 곧잘 내는 학생으로 난 다양한 분야에서 흥미와 재기를 보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족하지만 늘 밝은 웃음으로 지냈던 어린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일 중 하나는 밝고 붙임성있는 성격을 주신 것이다. 어디서나 누구하고나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까다로운 성격은 없었다. 냄비에 밥을 통째로 비비면 여러사람들과 숟가락 같이 꽂아두고 맛있게 먹었었다. 특별히 그런 것을 게의치 않았다.
들판 농사일도 도맡아하시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수업이 파하고 나면 곧장 달려와 봄이면 모판도 뒤집고 여름 가을이면 새참을 지고 논둑길을 재바르게 오갔다. 어머니가 뭐든 시키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매일매일 발랄하게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날부터는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다.
이래저래 주변에서도 내 노래 실력이 꽤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노래잘한다는 칭찬들도 많이 했고, 나도 신나게 노래하는 것이 참 좋았다. 그때 주변에서 두루두루 해주시던 칭찬이 가수로서의 모습을 꿈꾸게 했다.
하지만 당장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야 했다. 어릴 때 우리가족이 살던 동네는 정씨 집안의 집성촌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두분이 모두 양반가 출신으로 예의범절을 중시하셔서, 솔직히 당시에 가수가 되겠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꿈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난 기어이 노래 레슨을 받으러 서울로 갔다
그때 뵈었던 분이 태진아씨가 부른 대중가요 ‘옥경이’와 나훈아씨의 ‘고향역’ 등을 작곡한 임종수 선생님이셨다.
임선생님은 나를 보시더니, “학생은 공부를 할 때에 해야 한다”며 우선은 가서 학업을 마치고, 나중에 부모님도 모시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난 기어이 학업을 마치자마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혼자 전라도 농촌마을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정말 추운 겨울날이었다. 쌀 한말을 이고, 김치 한통을 옆구리에 낀 채 먼 여정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지금이야 고속열차를 타면 전라도에서도 서울까지 세시간 남짓이면 되지만, 당시엔 거의 온종일 완행열차를 타야만 했다. 그때 나이가 어리다면 어린 19살이었다.
가족의 특별한 지원도 없이 차가운 날씨에 홀로 가는 모습에 어머니는 주머니에 돈 만원을 넣어 주셨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그 소중한 만원으로 나는 레슨비를 내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나와 인연이 되신 분이 가수 김상범 선배님이셨다. 한참 연습을 하면 선배님께서 뒤에서 나를 지켜보시더니 “끼가 다분하고, 붙임성도 좋고 또 밝고 부지런해 꼭 가수로 성공하겠다”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렇게 김선배님한테 발탁된 나는 노래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성우 송도순씨는 그당시 나를 항상 ‘촌년’이라고 부르셨다. 정말 쪼그맣고 새카맣게 생긴 아이가 아무런 욕심없이 노래를 하겠다며 발랄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도 순박하고 예뻐보여 그렇게 부르셨다고 하신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