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벗에서 간호까지…“행복해요”
모두가 설레는 연말이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소외된 이웃들이 있다. 그들 곁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으로 베푸는 가정전문간호사들.
외로운 이웃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자선주일, ‘취재 현장속으로’에서는 가정전문간호사와 함께 하며 진정한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배워본다.
# 움직이는 종합병원
오전 8시, 아침부터 서울 왕십리 성당에는 어르신들이 잔뜩 모여든다. 한 교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장례미사. 어르신들에게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본당가정전문간호사 표옥경(마르가리타, 52)씨가 있다.
“지난주에 방문했을 때만해도 저랑 신나게 이야기 나누던 분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니 마음이 아프네요.”
눈 앞에는 저번 방문때 예쁜 꽃무늬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렇게 한 분 한분 떠나보낼 때는 아픔이 사무쳐온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길 새도 없다.
사무실 옆 교리실에 혈압기, 당뇨측정기 등 간단한 의료도구들을 가지런히 준비해 놓자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찾아왔다. 할머니들이 들어서기 무섭게 표씨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할머니 약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어? 까먹지 말고 꼭 먹어야 해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섞인 말투 때문일까. 그의 잔소리에서는 어머니를 걱정하는 딸내미의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목요일은 노인대학 수업이 있는 날, 다른 요일보다 특히 바쁘다. 본당에는 성심노인대학(65~75세 대상)과 한나시메온학교(75세 이상)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번 정기검진을 비롯 보건교육,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주고 있어 가정간호사도 그만큼 할 일이 많지만 힘든 줄도 모른다.
“가정간호는 본당과 연계가 잘 이뤄져야 활성화 될 수 있는데 왕십리 본당은 주임신부님, 수녀님, 신자들 모두 열심히 도와주셔서 제가 편하죠.”
게다가 연말이라서 그런지 그를 찾는 곳도 많다.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가정에서 언제 올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전화가 끊이지 않고 울린다.
본당 어르신들의 치료가 끝나자 표옥경 간호사가 ‘움직이는 종합병원’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가정을 찾아갈 시간, 빠뜨린 것은 없는지 꼼꼼히 의료품과 약을 챙기는 건 기본이다.
“아버지, 오늘도 간호를 나갑니다. 저와 함께 해 주셔서 아무 탈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출발 전에 하느님께 기도를 마친 그는 “자~! 출발합니다.”라며 힘차게 외쳐본다.
첫 번째 방문지는 성당 근처에 있는 한 가정이다. 들어서자 보호자들이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간호사가 아닌 한 가족이었다. 환자는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처음 만났을 때는 상태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욕창에서 나는 악취에 소변줄까지 끼고 있었다. 하지만 백의의 천사 표씨는 불평불만은 물론 싫은 표정도 짓지 않았다. 정성껏 환자를 돌봤다. 환자가 필요로 하면 바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몇 군데의 욕창만 남기고 모두 치유됐으며 지속적인 배뇨훈련을 통해서 소변줄도 제거했다.
환자의 치유만큼 기쁜 소식이 또 있었다. 처음 방문 당시 타종교 신자였던 보호자 가족이 올 6월 세례를 받고 왕십리 본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
고인식(안토니오, 53)씨는 “욕창 환자들은 다른 환자에 비해서 정말 어려운 점이 많은데 표간호사님이 정성스럽게 돌봐주셔서 늘 감사하다”고 전했다.
#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
하루에 방문하는 가정이 6~7군데. 빠듯한 일정으로 피곤이 밀려와 한 군데는 내일로 미룰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마음이 전해져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못해요. 물론 체력소모가 많아 피곤하기도 하죠. 그런데 저만 기다리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저 피곤한게 문제인가요?”
간호사 경력 15년의 표씨가 가정간호를 한지 4년이 지났다. 본당에서 빈첸시오, 연령회 등 봉사를 했지만 간호사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가정간호의 길에 들어섰다. 대구 경북대에서 1년 과정의 가정간호교육을 받고 3년 전 서울 왕십리 본당에 배치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간호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병원을 벗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직접 찾아가 치료를 해주는 일이라고 여겼지만 가정간호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가정간호사는 그냥 간호사가 아니예요. 할머니들 약도 챙겨드려야하고, 말벗도 해 드려야하고 사회복지문제도 해결해 드려야 해요. 치료는 그 다음이에요.”
행당동의 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독거노인을 방문한 그는 가정간호사에서 엄격한 어머니로 변신한다. 얼마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할머니에게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묻는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할머니를 어르고 달래서 자세히 듣는다. 그리고나서야 차근차근 할머니에게 유의점을 설명하고 병원에 가자고 설득한다.
백의의 천사 간호사인 그는 잔소리꾼 딸내미에서 엄격한 어머니, 다정한 말벗까지 자유자제로 변신한다.
“가정간호를 하면서 느낀 건데 사실 제가 환자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환자분들에게 제가 받는 것이 더 많아요. 반기는 모습과 어르신들이 건강해지는 모습에 제가 더 기쁘고 행복해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시 움직이는 종합병원을 몰고 성당으로 돌아가는 그는 차안에서 “할 수 있는 한 계속 가정간호일을 하면서 어르신들과 함께하고 싶다”며 그저 소박한 웃음을 보인다.
■ 본당연계 가정간호란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고자 마련된 가톨릭가정간호센터는 2003년 구의동본당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본당연계 가정간호’를 시작했으며 현재 60여 개 본당에서 운영되고 있다.
환자들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모습의 본당연계 가정간호는 각 본당에 배치된 전문 간호사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영세민이나 소외된 환자들을 방문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본당 성직자, 수도자, 신자가 지역 내 환자를 방문해 영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간접적인 선교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정간호는 양질의 보건의료서비스를 가정에서 받아 시간과 의료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전문가에게 충분한 설명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혜택까지 있다. 특히 보호자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어 환자 치료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가 간호능력도 높일 수 있도록 돕는다.
가정간호센터 부센터장 정현숙(연희마리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는 “본당연계 가정간호는 본당을 중심으로 저소득층 환자들에게 골고루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내년에는 독거노인과 치매노인들에게 중점을 두고 가정 호스피스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문의 02-59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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