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근거해볼때 ‘신앙인’ 맞다
몇몇 상소에서 천주교 신자로 규정
달레의 교회사 ‘병자성사 받음’ 언급
배교 후 회개…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최근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는 가운데, 다산의 신앙에 대한 논란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다산은 과연 천주교 신자였을까.
교회사학자 용인대리구장 김학열 신부는 “역사적 사료를 모두 검토한 결과 다산은 분명한 천주교 신자다”라고 말한다. 다산의 신앙과 관련한 최근 김학열 신부의 연구 글을 3회에 걸쳐 요약해 싣는다.
근래에 이르러 일부 식자들을 주축으로 엉뚱한 논리로 다산 정약용(요한)을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들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천주교의 근본을 흔들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창시자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산 정약용 요한은 심약한 배교자였으나, 회개하고 보속하다가 천주교 신앙인으로 선종하였다. 벽위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인년(1806)에 강준흠이 상소한 글이다.
“정약용이 반촌에서 흉적을 모으고 집에는 요망한 무리들을 길러서,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 그 사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병진년(1796)에 한 차례 상소하여 겉으로는 탈을 바꾼 것처럼 꾸몄으나, 실속은 성상을 속이는 계략이었습니다. 황사영의 백서에 ‘이가환, 정약용은 겉으로 배교한 듯하지만, 가슴속에는 늘 끊어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고 한 것은 저들의 심정을 사실대로 그려낸 것입니다.”
무자년(1828) 예부좌랑 윤극배의 상소도 역시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 규정하고 있다.
“사역의 괴수, 정약용은 19년 동안 바닷섬에서조차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설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편안히 고향에 돌아가 있을 때에는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신명처럼 받들어 섬겼으며, 또한 옥사로 가환, 관검이 도륙을 당하였음을 한편으로 당화처럼 보고 나타나게 원통하다 하였다.”
이렇게 벽위편에서 보듯이, 그토록 상소를 올리면서 정약용의 처형을 주장하던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을 옹호한 대표적인 선각자로만 둔갑시키려고 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였다가 나약한 심성으로 배교하였으나, 신앙인으로 회개하여 선종한 정요한(정약용)은 사라지고, 자신들만을 옹호한 다산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달레의 교회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 정약용 요한은 이전보다도 더 열심히 모든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801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입으로 배반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재(大齋)를 지키고, 그밖에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며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띠고 한 번도 그것을 끌러 놓지 않았다. 그는 자주 오랫동안 묵상을 하였다. 정약용 요한은 그의 묵상의 일부를 적어놓았고, 또 외교인들의 미신을 반박하고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은 여러 가지 다른 서적들을 남겼다. 그의 저서 여러 권이 박해 때에 땅 속에 감추어졌다가 벌레에 갉아 먹히고 썩고 하였으나, 많은 저서가 그의 집안에 보존되었다. 완전히 복권이 된 뒤에도 정요한은 생활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아니하였고, 날로 더해가는 그의 열심은 전에 그가 배교함으로 인하여 나쁜 모범을 보였던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고 감화시켰다. 정요한은 1835년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뒤(1833∼1836년 거주), 그의 손으로 마지막 성사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모든 사실을 명쾌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눈에 불을 켜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터에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가문의 멸망을 피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폐기하여 버렸거나, 달레의 기록처럼 숨겨서 보관하다가 벌레에 먹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기록들은 많은 부분이 회고록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희미한 기억으로 자신의 불리한 입장을 감추려고 하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은 다른 자료들로 보완이 되어야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다산 정약용의 병자성사를 부정하고 있다.
다산은 1836년 결혼 60주년일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75세로 운명하였다. 그런데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거행하였다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는 1836년 양력 4월 4일 이전에 서울을 떠나 산서성 고향집으로 출발하였다.
즉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이전에 서울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인 4월 4일 이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그가 어떻게 4월 7일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할 수 있겠는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그가 4월 7일 辰時初刻 (7시초)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했다는 주장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김상홍, 다산학 연구, 1990 계명문화사, p.46-48).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병자성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병자성사는 반드시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서만 시행하는 성사가 아니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여러 차례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로 보아, 교회사는 교회의 신학을 아는 사람에 의해서 올바로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을 배교자로 결론짓고 자신의 편으로 보는 측에서는, 모든 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앙생활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가진 사람은 교회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일반 사학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내의 자료가 국외의 자료보다 우선한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릇된 추리를(Faction) 학설로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있는 사실을(긍정) 기록한 자료를 추리로(가설) 번복할(부정)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빈치 코드라는 추리소설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신학을 배우지 않은 역사가가 교회사의 자료를 다룬다 해도, 그는 교회사가가 될 수 없다. 신학적인 지식 없이는 교회사를 정확히 볼 수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일반 역사가는 교회사를 연구할 때, 교회의 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외적 현상만을 다룰 수 있으며, 자칫 그릇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세 후기 교회의 ‘대사’의 오용과 남용에 따른 이른바 ‘면죄부’가 그러하다.
또한 교회 내의 학자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될 수 있는데, 문제에 대한 종합과 결정적인 판단은 교권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계속)
용인대리구장 김학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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