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를 만나러 파리에, 라파엘로를 만나러 피렌체에, 티치아노를 만나러 비엔나에 가지 않아도…. 최근 국내에서도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특별기획전들이 풍성히 이어져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술관이나 박물관 찾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림을 잘 볼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악 감상에서도 같은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비단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나 성악가들의 음악회 뿐 아니라 각 성당에서도 우수한 연주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귀에 익숙한 곡들이라도 왠지 잘 안다고 하기엔 망설여집니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그 자체로 서양 문화라고 일컬을 만큼 역사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왔습니다. 특히 서양 미술과 음악은 그리스도교를 위해 존재했고, 또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없이 미술과 음악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올해부터 독자들에게 선보일 ‘쉽게 보는 교회미술 산책’ ‘쉽게 듣는 교회음악 산책’은 분야별 전문가들의 해설을 통해, 세계 유명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쉽게 느껴보는 자리입니다.
미술산책에는 고종희 교수(마리아, 한양여대), 김현화 교수(마리아, 숙명여대)가, 음악산책에는 최호영 신부(가톨릭대), 이용숙 음악칼럼니스트(안젤라)가 각각 수고해주십니다.
고종희 교수는?
첫회 필자인 고종희 교수는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문과대학에서 르네상스 미술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양여자대학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성전에서 피어난 예술’ ‘명화로 읽는 성서’ ‘미켈란젤로와 떠나는 예술여행’ 등 다수가 있다.
성탄을 주제로 한 그림은 수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을 남긴 후고 반 데르 고스의 ‘목동들의 경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작품 제목이 말해주듯이 경배하면 떠오르는 “동방박사의 경배”가 아니라 “목동들의 경배”인 까닭이다.
이 작품 이전 목동들이 경배하는 장면은 그림 한 귀퉁이에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도였지 특별히 작품의 주인공으로 주목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후고 이후 목동들은 성탄 그림에서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그림은 세 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앙에는 성모님과 성 요셉 그리고 세 목동들이 땅바닥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있다. 좌측에는 주문자인 포르티나리와 두 아들이, 우측에는 아내 마리아와 딸이 각자의 수호성인과 함께 역시 예수님을 향해 경배를 드리고 있다.
성경의 인물들과 성인들, 그리고 작품을 주문한 세속인들이 모두 중앙에 있는 아기예수님을 향해 경배를 드리고 있는 구도이다. 공중에 있는 천사들도, 지상에 있는 천사들도 아기예수를 향하고 있으니 비록 땅바닥에 가장 낮고 겸손하게 자리 잡은 아기이지만 그리스도는 진정 이 그림의 핵심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이들 등장인물들 중에서 압권은 세 목동들이다. 이들의 얼굴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된 적이 이전에는 없었다. 후고의 작품이 이탈리아에 전해진 후 화가들 사이에서는 실물처럼 사실적인 목동을 그리는 것이 유행을 했다.
화가가 목동에게 특별한 역할을 맡긴 것은 이들 목동의 뒤쪽에 그려진 언덕 저편을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이 작지만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천사의 갑작스런 출현에 눈이 부신지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루카복음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복음서 중 유일하게 루카복음에서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고, 또한 목동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를 드리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그 밖에도 다양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가장 앞쪽에 희고 붉은 나리꽃이 있는데 이는 성모님의 순결을 상징하고, 볏단은 성체인 밀떡을 상징하며, 왼쪽에 성 요셉이 벗어놓은 나막신 한쪽은 겸손을 상징한다. 물론 성모님 뒤쪽 마구간에는 소와 말의 모습도 보인다. 사물 하나하나의 모습은 목동의 얼굴만큼이나 생생하고 정확하게 그려졌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중앙의 성모님과 왼편의 성 요셉은 천사들이나 목동들에 비해 훨씬 크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우의 두 수호성인들도 주문자에 비해 몹시 크다. 그러고 보니 천사들도 입은 옷에 따라 계급을 달리한 듯이 보인다.
앞 쪽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와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천사들이 있고, 뒤쪽과 공중에는 마치 수도자와 같이 소박한 옷을 입은 천사들이 보인다. 특히 뒤쪽 공중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천사는 미사를 드리는 사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중요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달리하여 그린 것은 전형적인 중세 방식이다.
그러나 후고가 활동한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로서 이미 성인과 세속인을 똑같은 크기로 그리는 이른바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과학적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이 화가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자 한 것일까?
작품이 완성된 것은 화가가 죽기 전인 1479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인간 중심의 인문주의적 관점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인간은 신 앞에서 여전히 작고 보잘 것 없음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고라는 이 화가는 사실묘사 능력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탁월했으나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기 보다는 주님을 경배하고 찬미하는데 자신의 재능을 봉헌하였다.
위대한 작품은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성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Tip
작가 후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 1435~1482)는 수도자로서 성 아고스티안 수도원에서 늘상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의 대표작인 ‘목동들의 경배’는 포르티나리 제단화라고도 불린다. 폭이 5m68cm, 높이가 2m53cm인 당대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네델란드 지역)에서 제작된 가장 규모가 큰 제단화이다.
후고가 활동하던 브뤼게에서 그려져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소장돼 있다. 이 작품은 플랑드르의 화풍을 이탈리아에 알리게 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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