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선진국 향해…더 큰 발걸음 내딛자
강연·연극제·음악회 등 행사 통해 대국민 홍보에 주력
사형폐지 위한 국제연대 강화로 인류의 희망 제시해야
생명수호와 생명문화 건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열차가 ‘희망’역에 도착했다.
사형집행이 중단된 지 꼭 10년이 되는 2007년 12월 30일로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사형제도 폐지’라는 염원을 싣고 힘겹게 고개를 넘어온 ‘희망 열차’는 새로운 여정을 향해 다시 한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오늘이 있기까지
지난 1948년 건국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979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매년 20명에 이르는 이들이 ‘제도적 살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한 셈이다.
독재정권 아래 ‘인권’이란 말조차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1970년대까지 사형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몇몇 뜻있는 종교인이나 학자들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 지금은 인권의 가늠자라 할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법정에 서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1987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힘을 얻기 시작한 사형폐지운동은 1989년 유엔 총회가 사형폐지결의안을 가결한 것에 힘입어 그해 5월 30일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 불교 등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출범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9년 우리나라에 헌법재판소가 창설된 후 사형제도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92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8만6509명의 서명을 받아 헌법재판소에 사형제도폐지 촉구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우리 사회의 발걸음은 답보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오랜 동안 눌려온 인권의식이 일반 대중 속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소수의 지식인이나 인권운동가 사이만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민들의 범죄에 대한 시각도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99년 10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죄인을 감옥에 보내는 목적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란 응답이 53%로 전 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높았다(전 세계 평균은 32%). 반면 ‘교화시키기 위해서’와 ‘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각각 19%, 15%에 그쳤다. 2003년 갤럽조사에서는 사형제에 대한 찬성(52.3%)이 낮아지고 반대(40.1%)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 등 흉악범죄가 발행할 때마다 ‘사형제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해있던 사형폐지운동은 2000년 대희년을 계기로 범종교적인 운동으로 확산됨으로써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전기를 맞게 된다.
사형제도 폐지의 당위성을 알리고 실천을 촉구하는 선에 머물던 사형폐지운동은 2001년 1월 19일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등 7대 종단의 종교인들이 모여 ‘사형제도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을 결성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가 하면 시민사회단체들과 사형제도폐지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활동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
아울러 과거 성명서 발표 수준에 머물던 사형폐지운동은 대국민 순회강연회, 연극제, 음악회 등 각종 문화행사와 교육 프로그램, 국회 및 행정부를 대상으로 한 활동 등으로 다양하게 확산됨으로써 ‘생명문화’의 건설이 종교인뿐 아니라 의식있는 이들의 주요 의제로 자리잡아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가운데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목소리를 꾸준히 높여 오는 한편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파하는 선구자적 모습을 보여 왔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를 주축으로 이뤄진 사형수의 대모이자 세계 사형폐지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헬렌 프리진 수녀 초청 강연을 비롯해 사형폐지를 염원하는 각계 저명인사들의 릴레이 기고, 세계 사형반대의 날 행사 등은 교회가 일궈온 인권의 지평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반생명적 흐름의 그늘을 지워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5월 국가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와 정부에 사형제도폐지 입법을 권고하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국제엠네스티가 우리나라를 사형제도폐지 집중캠페인 국가로 선정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이루며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국제적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 나아가야 할 미래
이제 사형폐지운동은 ‘사실상 사형폐지’라는 현실적 성과를 밑거름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법과 제도적으로 완전한 사형폐지를 이뤄내 인권선진국을 향한 더 큰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아울러 범죄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 제도적 지원을 비롯,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화해, 나아가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국제 연대 등을 통해 사형폐지운동이 생명의 문화를 확장하고 인류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라는 커다란 도약의 시기에 우리나라가 인권선진국으로서 어떠한 준비와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교회는 일관되게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사랑이며 선물’이란 점을 역설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고 살려내는 생명의 문화 건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강조해오고 있다.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진입으로 현실적인 의미에서 사형제도가 효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사형제도로 대변되는 반생명적 흐름을 되돌려 놓지 않는 한 생명을 향한 걸음을 늘 도전에 처할 수밖에 없다. 뜻있는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지난 제15대 국회 때부터 16대, 17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매번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이 발의됐으나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미래지향적인 인권 신장을 위한 원칙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생명의 문화 건설이라는 비전에서 한참 비껴선 모양새여서 교회가 나서야 할 지점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인권 문제는 시기상조가 아니었던 적이 없고 심지어 최초로 문제제기가 되었을 때 불법이 아니었던 적도 없다.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진입을 전기로 우리 사회의 인권 전반의 현재를 돌아보고 참다운 생명의 문화를 일궈나가는 일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가 법적으로 사형제를 유지하면서도 10년간 단 한건의 사형도 집행하지 않은 나라에 부여하는 일종의 국제 공인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지난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사형 집행 이후 10년째 단 한 차례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반열에 들어서게 됐다.
우리나라가 새로이 진입한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대열에는 아프리카 케냐, 스리랑카 등 이미 32개 나라가 함께 하고 있다. 경제력이나 민주화 정도, 인간개발지수(HDI) 등 국력을 나타내는 지표가 우리나라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한참이나 뒤쳐져 이 대열에 함께 하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된 나라 가운데 다시 사형을 집행한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형제도 폐지를 통해 신장된 인권의식과 생명존중 의식이 거꾸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는 완전한 사형폐지국가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라 할 수 있으며,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역사는 사형제도가 인류 스스로가 자신에게 새긴 상처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 길에서 우리나라는 의미있는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사진설명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세계 사형 반대의 날’을 맞아 2006년 11월 30일 사형폐지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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