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너무나 사랑하는 한 아버지가 있었다. 어느날, 딸에게 묻는다.
“우리 음악 감상실을 차릴까 아니면 빵집을 차릴까?” 어린 딸은 ‘빵집을 차리면 실컷 빵을 먹을 수 있을거야’라며 “아버지, 우리 빵집을 차려요”라고 대답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꿀밤을 한대 주며 말한다. “빵은 순간의 양식은 될 수 있지만, 영혼의 양식은 될 수 없단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란다.”
음악 감상실이 좋으냐, 빵집이 좋으냐
아버지 김수억(요셉)씨는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왔다. 클래식 음반이 귀하던 시절, 음악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갖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미군부대나 미국 친지에게 부탁해서 구하곤 했다. 그렇게 모은 1000여 장의 음반은 소중한 보물이 됐고, 그는 음악과 살며 음악을 함께 나누고자 결심한다.
1957년 5월 13일 대구 시내 중심가에 고전음악 감상실 ‘하이마트’(Heimat)를 열었다. 독일어로 ‘고향’. 음악 자체가 정서적 위로감을 주는 고향과 같기에 ‘하이마트’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곳은 김춘수 시인과 작곡가 나운영 등 당시 지역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문화 아지트가 된다. 그리고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하루 400여 명 가까이 감상실을 찾았다. ‘빵집’에 미련을 뒀던 어린 딸도 아버지를 도와 음반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레 음악 사랑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교복차림의 딸은 지금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됐다. 세월이 흐르고, 모습이 변한 것처럼 고전음악 감상실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아버지는 딸에게, 딸은 그 아들에게
2007년 12월. 반세기를 이어온 그 하이마트를 찾았다. “예전 이야기를 해주세요.” 기자의 요구에 딸 김순희(마리아.62.삼덕본당)씨는 기억을 더듬는다. 1969년, 아버지가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때로…. “순희야, 내가 없더라도 하이마트를 맡을 수 있겠지.” “네, 아버지. 제가 혼자서 꾸려갈 수 있으니 걱정마시고, 일어나셔야 해요.…”
그것은 마지막 유언이 됐다. 평소 ‘내가 죽거든 헨델의 메시아를 가슴에 얹어다오’라고 당부하던 아버지는 순희씨의 곁을 떠났다. 당시 갓 대학을 졸업했던 딸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새기며 하이마트의 주인이 됐다.
잘나가던 시절도 잠시, 80년대 전축과 카세트테이프가 대중화되면서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더구나 대구 지하철 공사로 손님들의 불평이 잇자 순희씨는 이전을 결심한다. 83년 하이마트는 새 상권의 중심지인 공평동에 새둥지를 튼다. 하지만 끊어졌던 발길이 다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버지께 약속을 드렸는데,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지금와서 돌아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고, 사랑이 아닌가 싶네요. 감사하는 마음 뿐입니다.”
오랜 시간, 여인의 힘으로 어떻게 버텨왔을까? 아버지와의 약속과 기도로 감내해온 세월이었으리라. 매일 새벽미사를 봉헌하며 하루를 여는 그는 오전부터 밤까지 한명이라도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며 365일 하이마트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에게는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프랑스로 유학갔던 아들이 7년만에 돌아온 것.
아들아, 100주년은 네가 맡으렴
순희씨가 감상실 소파에서 젖을 먹여가며 키운 아들이다. 무역학을 전공하던 아들이 보통 사람처럼 취직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아들은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며 다시 음대에 진학했다.
“만약 아들이 음악을 안하고 다른 일을 했다면, 아버지의 손때 묻은 음반들을 누구에게 맡길지 고민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뜻을 잇는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맙다.
아들 박수원(프란치스코 하비에르.37)씨는 프랑스 리옹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오르간과 작곡 과정을 졸업했다. 지난해 여름,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 이경은(미카엘라.34)씨와 두 아이와 함께 대구로 돌아왔다. 현재 하이마트는 순희씨 그리고 아들 내외가 함께 맡고 있다. 지역 클래식 동호회 모임 중심으로 꾸려진다.
지난 5월, 50주년을 맞아 작은 기념 자리도 가졌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헨델의 메시아와 여가수 테발디의 노래, 아들과 며느리의 연주를 담아 기념음반을 만들기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이어 3대째 하이마트를 지키는 박수원씨. 반세기를 밑거름 삼아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뜻과 어머니의 뜻을 존중하면서 현재에 맞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소수의 마니아 중심이 아닌 음악으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느끼고 싶은 이라면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순희씨가 말한다. “100주년은 아들이 맡아서 해주겠죠.”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문의 053-425-3943
사진설명
▶감상실에 놓인 고 김수억(요셉) 선생의 초상화.
▶50년이 넘은 칠판. 오늘의 감상곡이 적혀 있다.
▶엘피판이 돌아가고 있는 턴테이블.
▶김순희씨가 아들 내외와 함께 웃고 있다.
▶작은 전축실 안에서 오래된 앨범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김순희씨와 아들 박수원씨. 세대는 다르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하이마트를 지켜가겠다는 마음은 같다.
▶하이마트의 중심인 전축실과 오르간을 연주하는 박수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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