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셈이 참 빠른 분이시다. 부족하게도 주지도 않지만 남게도 주지 않으신다. 좀 넉넉하게 주시면 좋으련만 어쩜 그렇게 맞춤으로 딱 떨어지게만 주시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교만하지 말라는 뜻일게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로 하는 것임을 알라는 말씀일 것이다. 또 신자들을 바라보는 눈을 똑바로 가지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신부생활을 하면서 돈이 없어서 해야 할 일을 못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임지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 곳에서도 그랬다. 성체조배실을 지을 때도 그랬고 교육관을 수리할 때도, 성모동산을 만들 때도 그랬다. 이 곳에서 ‘위로의 주님 동산’과 ‘순교자의 십자가 길’을 조성할 때도 그랬다.
내가 있는 ‘바다의 별 청소년수련원’에는 같은 울타리에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이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성지’는 아니다. 그래서 조심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일전에 오랜만에 만난 동창신부가 지금 하는 일을 묻더니 성지도 아니면서 성지인 척, 착한 신자들에게 ‘성지 장사’ 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한편으로는 섭섭했지만 맞는 말이라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지순례를 가면 왠 돈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본당신부할 때 나도 느꼈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속된 신자들이 없고 지원도 없으니 순례자들의 봉헌으로 성지를 조성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꾸미면서 고수하는 한 가지 원칙은 순례자들 앞에서 돈 이야기는 안 한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 조성한 ‘순교자의 십자가 길’의 매 십자가 앞에 작품을 설명할 판 아래 조그맣게 ‘봉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글귀를 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15개의 십자가 중에서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봉헌됐다. 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봉헌하시는 분들을 보며 우리 신자분들이 참 착하고 신앙이 깊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15가지 사건을 배열하고 그 사건마다 의미가 연결되는 각기 다른 십자가를 15개 세운 길이 ‘순교자 십자가 길’이다. 교회사를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오르는 길이다. 그 십자가 작품들이 딴에는 정성을 기울여 만든 것이지만 흡족한 작품도 있고, 왠지 부족하다는 느낌의 작품들도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순례하시는 신자분들이 느끼는 것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각자의 신앙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기 때문에 위로를 얻고 느낌을 얻는 십자가도 다 달랐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는 십자가도 달랐던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섬기면서 그 일을 한다면 하느님은 그 일을 이뤄주신다. 셈이 빠르신 하느님은 교묘하게도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이루신다. 착한 신자들을 통해서….
이재학 신부 (인천 바다의 별 청소년수련원 원장)
그동안 집필해 주신 이재학 신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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