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것 주님께 봉헌합니다”
최근 본사 편집국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발신지는 중국. 이 ‘중국에서 온 편지’는 현재 흑룡강성에서 한족 할머니 7명과 조선족 1명을 돌보고 있는 한국인 최베드로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보낸 것. 최수녀는 간단한 인사와 더불어 함께 생활하는 할머니 한 분이 쓴 장문의 글을 동봉했다.
필자인 서마리아 할머니는 이 ‘신앙 간증’에서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오늘까지의 삶 안에서 체득한 신앙과 하느님의 사랑을 생생히 고백하고 있다. 본지는 “중국 선교사들에 관심을 갖고 기도해주시는 분들께 전달되었으면 한다”는 최수녀의 지향을 고려, 전문을 게재한다.
불교 집안서 태어나 천주교 신자와 결혼
1933년 가을에 포동포동하고 어여쁜 아이가 아성 서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때 당시에 할머님이 “계집아이구나!” 하시고는 머리를 돌리고 나가셨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은 조상대대로 불교를 믿는 집안입니다. 하루는 할머님이 불당에서 염불을 하고 나오시는데 마침 어머니가 마당을 쓰시다가 그만 할머니의 신발에 비가 부딪쳤답니다. 할머니는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시며 “흉악의 징조다. 조원아(아버지의 이름)! 이 년을 때려라, 이 계집애도 같이 때려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고 뛰쳐 나와 어머니와 저를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여자들을 짐승같이 생각하고 어머니와 저를 매일 구박하고 때렸습니다. 매일매일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지옥같았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여자들을 벽의 흙과 같이 다루었습니다. 더러워지면 다시 발라서 새로운 벽이 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러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24살 때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의 성명이 ‘량(세례명)’입니다. 저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시집은 천주교를 믿는 가정입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두가 저를 존중하며 좋아하였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정에서 사랑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친정과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신’이라 하였습니다.
‘신’이 한 달 되었을 때, 시어머님이 저더러 남편과 함께 ‘신’을 안고 ‘하얼빈’ 큰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시어머니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얘야! 네 머리카락하고 예수님의 머리카락하고 같구나. 다 곱슬머리구나! 정말 우리 식구가 되려고 우리 집에 시집 왔구나.” 좀 멈추었다가 또 말씀하시기를 “얘야! 너와 아기가 이번에 같이 세례를 받으려무나” 하시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친정은 조상 때부터 이어오는 불교가정인데, 또 저 역시 영향이 깊어서 즉시 개종한다는 것이 힘들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님은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제게 강제로 믿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손자가 말도 잘 못할 때부터 시어머님은 글자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루는 글자 여러 개를 놓고 ‘신’에게 ‘천(天)’자를 찾으라고 했더니 조그만 손이 글자 몇 조각을 뒤지더니 그 속에서 ‘천’자를 쥐고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쳐주고 칭찬하며 ‘주(主)’자를 찾으라고 했더니 또 ‘주’자를 찾아 역시 머리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박수 쳐 주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조그만 손으로 손뼉치며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천주를 찾았습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 암 선고 후 세례 받아
어느새 저와 남편은 60고개를 다 넘었습니다. 남편 ‘량’은 대기업의 공정사였고, 저는 이미 교육 공직을 은퇴하고, 아들 ‘신’도 대학을 졸업해 모두가 그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지요.
1986년 남편이 직장에서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갑자기 배가 아파서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며칠 후에 저와 남편은 삼월에 내리는 눈길을 밟으면서 북경을 향한 기차에 올랐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남편을 모시고 의원에 검사하러 갔습니다. 이튿날 병원에 가서 검사결과를 물어보니,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암’입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기껏해야 3개월 밖에 사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세요”라고 하더군요. “예? 뭐라구요?” 한마디 하고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얼마쯤 지나 누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남편의 회사에서 같이 온 직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나는 힘을 다해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안됩니다. 직장도 당신이 있어야 하고, 아이들도 당신이 있어야 하며, 나는 더욱더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는 쓸데없는 사람이니 저를 데려가시고 대신 남편만큼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저는 고통 속에 깊이 잠겨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의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생활은 어떻게 하며, 남편없이 고독하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죽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생겼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들을 놓고 죽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므로 고통 중에 발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어느 누군가 나를 가리키는 듯한 느낌으로 갑자기 ‘시집이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집안이 아닌가? 하느님께서는 우리 남편을 구하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굳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불교를 믿는 친정에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천주교를 믿는 시집에 와서 너무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었고 남편이 제게 너무 잘해줬기 때문에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믿는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경에서 천주교당을 찾아갔는데 아주 큰 건물이었고 장엄하고 엄숙하여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 신부님을 만나 영세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세례를 왜 받으려고 합니까?”하고 물으셨지만, 남편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제 뒤에 계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따라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또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삼위이신데 몇 위가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나요?” 저는 천주교 교리를 조금도 모르니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때 역시 뒤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제2위입니다” 하고 대답해 주어서 저 역지 “제2위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신부님은 속으로 ‘이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생각하셨겠지요. 하지만 하는 수 없이 “마귀를 끊어버립니까?”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에는 그 아주머니가 말하는 대로 대답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끊어버립니다” 하고 대답했지요.
이렇게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부님이 기도서 한 권과 묵주 하나를 주셨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제 뒤에 계시던 그 아주머니가 바로 대모님이었습니다. 이렇게 얼떨결에 세례를 받았지만 그 당시 저는 마리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대모님이 지어주신 대로 그냥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때서야 비로소 마리아가 성모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숭고한 성당 안 성모동상 앞에서 기도서를 펼칠 때, 눈물이 비오듯 흘렀습니다. 시어머님이 제 머리카락을 두고 말씀하신 것, 아들이 어렸을 때 ‘천주’라는 두 글자를 찾았을 때, 또 시집에서 사랑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해 온 긴 세월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어머님, 성모님!”을 부르며 저는 계속 성모님을 찾았습니다.
“당신의 아들, 제 남편을 꼭 구해주세요. 의사선생님이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지만 불쌍히 여기시어 2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하면서 진심으로 성모상을 보고 기도하는데, 자비로운 성모님이 웃으시면서 머리를 끄덕끄덕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드렸더니 매우 기뻐하면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이지요. 듣자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는 저를 향해 “참 좋아요. 우리 집은 이제 7대 천주교 신자 집안이군요”라며 꼭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병의 엄중성을 알고는 의사 선생님은 우리들을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습니다. 저는 땅에 무릎을 꿇고 “우리 남편을 꼭 살려주세요”하면서 애원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하는 수 없이 “한 가지 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이 국내에는 없습니다. 홍콩에 가야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성모님의 계시를 받아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여 약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이 약을 먹고 나서 병이 많이 호전됐습니다. 건강이 점점 좋아져서 다시 직장에 가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저 역시 말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열심히 기도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남편 임종 임박하자 자살 유혹받기도
1988년, 남편의 병이 다시 악화되었습니다. 이 때가 병이 처음 발생한 후로부터 꼭 2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성모님께 2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한 요구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고, 남편이 천당에 갈 날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병이 하루하루 심해질 때 제 심정은 무거웠습니다. 심지어는 같이 죽을 것을 생각하고 약을 준비해 놓았지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날 저도 약을 먹고 같이 죽어 천당에 가서 같이 살려고 했습니다.
이 일을 남편이 알게되자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 어서 약을 버려라. 내가 보는데서 어서 없애라”고 몹시 화를 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이 보는데서 약을 없앴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자살할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겁이 나지요. 주님을 믿고 보속할 기회를 얻은데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임종하는 그 날. 남편은 갑자기 숨을 길게 내쉬면서 “하느님, 저 참으로 힘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의 귀에 대고 “여보, 성모님을 부르세요”라고 했더니 다시 숨을 길게 쉬며 “성모 마리아”하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갈 집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88년 3월 어느 날 아침에 아들, 딸을 데리고 남편의 직장 동료들과 같이 남편의 의체(죽은 시체)를 모시고 화장터로 갔습니다. 이때 역시 작은 눈(雪)이 날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안배라고 봅니다. 아들 ‘신’은 시인이기 때문에 이 작은 눈으로 시를 지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뜬 후, 무한고통의 심정으로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남편이 병들었을 때 영세한 것은 남편을 위한 것이지, 그 대모님의 말씀처럼 영혼을 구원한다는 생각도 없이 남편만 돌보면서 집에서 기도만 했을 뿐 한 번도 성당에 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당서 성가대 지도하며 은총 경험
1991년 하얼빈에 살고 있는 아들네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들집과 성당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안배라고 생각합니다.
영육간의 조화로운 기분으로 성령이 충만된 미사성제 때에 신부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시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라며 제대 위, 아래에서 주고받는 그 기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묘한지…. 저는 그 소리에 끌려 마치 공중에 떠서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주 예수님! 당신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전 인류를 구했으니 주님 앞에 엎드리지 아니할 자 어디 있겠습니까! 찬송하지 아니할 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너무나도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주님의 사랑을 버렸습니다. 참으로 후회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해서 세상을 싫어할 수 없지요.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어 포옹해 주시니, 정신을 차리고 남은 여생이나마 주님께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죄 지을 기회를 피하고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따르겠습니다.
저는 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은퇴 전까지 음악을 가르쳤는데, 지금은 이 장점을 이용하여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남은 여생 하느님을 찬송하고 제 영혼을 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니 매우 기뻤습니다. 성가대에 참여하여 성가를 지도하고, 지휘도 하고, 새 노래와 곡을 만들어 교우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성가를 더 아름답게 부르기 위해 음성발음에 대해서도 지도하고 피아노도 가르쳐 주고 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성가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축일 미사 때마다 성가대를 조직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심지어 성탄절에는 제 자녀들까지 데려다가 아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저는 노래를 불러 신자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가대가 큰 박수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어 주님 안에 그 무엇도 비할 데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후 성당에서 수녀원을 세워졌습니다. 그 때 교구장님이 저를 찾으셔서 수녀원에서 음악선생님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거절하려고 했으나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셨는데 저 역시 주님을 위해 이만한 것쯤이야 봉헌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대가없이 교구장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몇 년간 있는 힘을 다하여 주님의 뜻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깊이 느낀 것은, 주님안에 형제 자매는 친형제이며 친자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 중 사회에 나가서 갖가지 일을 하는 이도 있지만, 남학생들 가운데 신학교에 가서 미사성제 때에 성체성혈을 이루는 신부님이 되신 이도 있습니다. “주 예수님! 이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2006년 한국의 순교복자 수녀원의 최베드로 수녀님이 이 곳에 오셔서 정양원을 설립하셨고, 저는 이 곳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노인들에게 성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최수녀님은 참으로 주님의 좋은 딸입니다.
수녀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을 잘 안배하여 뜻있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수녀님은 연세가 많으시고 병이 있어 건강하시지 못하지만 하느님을 위해, 특히 중국 선교를 위해 일생을 주님께 바쳐 외국까지 가셔서 모금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수녀님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구나!’ 하며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불교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갖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충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주님! 저는 전반생을 주님을 따랐으며, 앞으로 영원히, 제 영혼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
2007년 겨울 흑룡강성에서 서 마리아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