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었다. 성지를 가본 적이 언제였을까. 일 때문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성지를 찾은 것은 기억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한 가지 사실만이 남아있었다. 무덤과 다양한 동상들이 많은 곳, 그리고 끝도 없는 적막함이 공존하는 곳…. 성지에 대한 막막한 기억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최초의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왜 출가했는가’라는 부처님의 물음에 ‘세속은 좁고, 먼지가 난다. 들판은 광활하고, 탁 트여있다. 그래서 나는 출가했다.’
눈을 감았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세속의 티끌을 날려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성지 초입. 돌에 새겨진 ‘죽산성지’(전담 이용남 신부)라는 문구가 무겁게 들어온다. 뒤로 보이는 표지판은 성지가 800m 떨어져 있다고 나타냈다.
천천히 걸었다. 주변 풍경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에 몸을 맡겼다.
성역(聖域)이라 쓰여진 문에 도착했다. 4대 박해 중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곳.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5명에 이른다는 이곳. 옛날의 역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만이 넘치는 이곳에서 그들은 주님을 어떻게 증거하며 순교했을까. 이곳은 그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김도미니코’와 ‘여기중’, ‘여정문’ 등 세 사람의 순교 삶을 떠올렸다. 깊은 산속에 숨어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던 김도미니코. 그가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 명은 그의 딸을 겁탈하기 위해 딸을 내놓으라고 했고 그리 하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오겠다고 협박을 했다.
결국 그들에게 딸을 내어주고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한 김도미니코. 그의 삶에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고뇌와 번민이 밀려들었다.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한 여기중,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했다는 여정문의 삶을 통해 고통과 참혹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제대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 위치한 대리석으로 만든 대형 묵주알에 손을 갖다 댔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제대 뒤 언덕에 위치한 14처에서도 기도와 묵상을 했다. 다행이다 싶었다. 이렇게 아무 때나 기도를 드리고 묵상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성호경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죽산성지 주변에는 순교자의 피가 묻어있는 장소가 2군데 더 있다. ‘잊은터’와 ‘두둘기’라는 곳이다.
이진터는 고려 때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해 이진터라고 불렸다. 그러나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는 말이 있어 ‘잊은터’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순교의 처절함이 서린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두둘기라는 곳은 행정구역상 삼죽면 덕산리이다. 이곳은 진흙땅이어서 신 바닥에 진흙이 떨어지지 않아 두들겨 털었다 하여 두둘기로 불렸다.
이곳 역시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애절한 사연이 서린 땅으로 변했다. 당시 포졸들은 용인, 안성, 원삼, 가칠암이 등에서 숨어살던 교우들을 잡아가지고 돌아오다 두둘기에서 쉬었다. 포졸들은 이들에게 돈을 내면 풀어준다고 하며 두들겨 때렸다. 그리하여 이곳 역시 원래 의미가 퇴색해 교우들의 원한이 서린 곳으로 남아있다.
순교의 사형장으로서의 성지는 극소수에 불과한 가운데, 두들겨 때려 반쯤 죽인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순교성지는 죽산성지가 유일한 곳이다.
그 옛날 교우들의 신앙심이 발로부터 전해져 왔다.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심을 굳게 지키고자 한 그들의 온기도 느껴졌다.
성역문을 나왔다. 하늘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버스에 올라타 묵주반지를 매만졌다.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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