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삶이란 약자에 눈을 돌리는 것”
“허…. 사제의 길이나 기자의 길이나 어떤 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사제의 길을 향해 나아가다 또 다른 길로 ‘전향’한 이유를 묻는 물음에 허를 찔렸음일까, 최홍운(베드로·58·서울 논현동본당)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은 답을 찾느라 뜸을 들이는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태생부터 언론인이었을지 모르는 그에게 대답은 이미 준비돼 있었는지 모른다.
“신부나 기자나 결국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전하는 수단과 방식이 다를 뿐이지….”
그랬다. 그에게 기자의 길은 또 하나의 ‘성소’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신문 초대 직선 편집국장이라는 직함으로 언로에 있는 이들이나 뜻있는 이들에게 각인돼 있는 최 전 국장을 만나는 일은 기자에게도 조금은 색다른 긴장감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지난 1977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기록에서부터 따져도 꼬박 30년 넘게 언론에 몸담아 온 그를 인터뷰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낯이 붉어지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편집국장에 이어 논설위원실장(2004년)을 거쳐 지난해 말로 3년간 맡아오던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 자리에서도 물러나 30년을 헤쳐 온 험로에서 잠시 비껴선 듯한 그는 OB(졸업생) 리스트에 오르기보다 시쳇말로 아직은 팔팔한 ‘현역’이라는 듯 왕성한 활력을 주위에 전해주고 있었다. 늘 준비하는 자세, 깨어있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당장 새 학기부터 올해 처음 문을 여는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겸임교수로 초빙돼 강의 준비에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낭패감’과 ‘자긍심’
30여 년 언로를 헤쳐 온 최 전 국장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는 가운데 유독 이 두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단식과 삭발로 상징되는 민주화운동 시절, 앞장서 그 길을 걸어온 그는 험난했던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낭패감과 자긍심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1988년 4월 서울신문 역사상 최초로 노동조합을 결성해 이른바 ‘정권의 나팔수’ ‘권력의 시녀’라 불리던 신문을 ‘국민의 입’으로 탈바꿈시키는데 누구 못지않게 큰 몫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UCIP) 회장, 한국가톨릭언론인협회 회장 등으로 교회 안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겨온 그가 느껴온 낭패감은 ‘-답지’ 못한 모습에서 비롯됐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취재를 가면 우리에게로 돌이 날아오기도 했어요. 한 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부터는 인터뷰를 거절당하기도 했지요.”
언론이 언론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언론에 발을 들여놓을 때의 초심을 되새김질했다. ‘주님의 부르심’. 그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배경이었다.
“공기를 자처하는 언론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입니다. 권력자의 편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은 당연하지요.”
탄압과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오랜 준비 끝에 신문사가 아닌 서울 명동 YWCA에서 노조를 출범시켰던 일, 그리고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편집국장 직선제를 이뤄내 초대 직선 편집국장으로 뽑혔던 일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장면으로 꼽은 그에게서는 한번도 ‘주님의 가르침’이 떠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 그였기에 세계적 성가를 구가하고 있던 황우석 교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신의 논조에 비판적이던 사내 분위기나 경영진의 냉랭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목탁으로서의 몫을 수행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크고 높은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가난하고 힘겨워하는 약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을 보듬어 안는 길을 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를 향한 목소리도 넘치는 애정만큼이나 철두철미하다. 그의 표현대로 ‘뼈저리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신자나 일반인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면 교회가 서있는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2000년 전 예수님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운지 묻는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는 이들을 누구든 보듬어 안아주시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누구와, 어떤 고통을 나누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교회, 다가서기 힘든 사제라면 더욱 성찰과 반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하고 살고자 한 ‘-다운’ 삶에서 성찰의 지표를 찾아야 한다는 냉철한 비판이다. 언론계가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해서도 그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언론은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독자들의 신뢰는 내팽개치고 광고주라는 금력에 더 깊이 예속되어 가는 악순환 구조를 깨지 못한다면 언론의 쇠락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어떤 자리에서든 신뢰를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한 그는 가톨릭 언론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도 잊지 않았다.
“교회 언론은 일반 언론과 달라야 합니다. 수많은 매체가 있음에도 교회 언론을 찾는 독자의 입장에서 사도직을 실천해나갈 때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따뜻한 위로와 말씀, 시대를 관통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담아나가야 한다는 제언이다.
“모든 이들이 마지막에 찾을 수 있는 보루가 교회라는 자긍심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구로 그분께 의탁하며 산다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든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길을 앞서 닦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는 건 괜한 까닭이 아닌 듯했다.
■ 최홍운 전 국장은
1950년 1월 16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최 전 국장은 친가와 외가 모두 수 대째 이어오는 독실한 구교우 집안이었던 영향으로 일찌감치 신앙에 눈을 떴다. 성소의 길을 찾아 소신학교였던 서울 혜화동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신학교에 진학해 2년 반 동안 사제직을 향한 길을 걷다 나와 언론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77년 4월 서울신문에 입사한 그는 수습기자 시절 1, 2, 3지망 모두 남들이 꺼려하는 사회부 기자를 자청해 일선을 뛸 정도로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눈을 떠갔다.
노조 창립을 주도하기도 한 그는 사회부장과 논설위원, 편집국 부국장 등을 거쳐 지난 2000년 11월 첫 직선 편집국장으로 정론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을 뿐 아니라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한국언론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언론 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이달의 기자상’을 비롯해 민주언론발전 유공 공로상(전국언론노련), 제1회 자랑스런 한양언론인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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