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내리에 들어섰다. 멀리 와룡산이 보인다. 정상에 무언가가 보였다. 예수성심상. 두 손을 펼쳐들고 산 아래를 굽어보는 그 모습. 성지에 들어서기도 전에 평온해졌다.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우촌, 최초의 본토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 정은 바오로와 정베드로 순교자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곳.
이곳을 표현하는 수식어는 이 처럼 많다. 그러나 그 중 단내성지를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성가정’.
단내 성가정 성지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이곳에서 순교한 성 이문우 요한, 성 이호영 베드로, 성녀 이소사 아가다,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등 5명의 순교성인들 대부분이 가족 순교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성지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따뜻함과 함께 탁 트인 들판을 보고 있자니 마음과 눈이 오랜만에 호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가정 성지임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성가정상의 환영을 뒤로 하고 五位聖人殉敎碑(5위성인순교비) 앞에 섰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5인의 순교자 이름이 무겁게 느껴졌다. 남달리 극진한 가족 사랑을 보여줬기 때문일까.
이천 구월에서 출생한 이호영 성인(1803~1838)과 이소사 성녀(1784~1839)는 남매지간이다. 이호영 성인이 1835년 정월에 순교를 예시하는 신비로운 꿈을 꾼 후, 며칠 뒤에 남매가 함께 체포됐다.
이때 이호영 성인은 아내마저 체포하려는 포졸들에게 노모와 어린아이들을 위해 아내를 놓아달라고 간청했다. 가족 사랑에 감동한 포졸들은 이 청을 들어줬다.
결국 혼자 옥살이를 하게 된 이호영 성인은 4년간의 혹독한 옥고 끝에 옥사했으며 이소사 성녀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조증이 성녀(1782~1839)와 남이관 성인(1780~1839)은 부부지간이었다. 신자들 사이에 살아있는 성녀라고 일컬어지던 조증이 성녀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친정인 이천으로 피신시키고 남이관 성인 대신 체포됐다.
이후 남이관 성인도 배교자의 밀고로 이천에서 체포되었고 부부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야외광장 우측면 오방이산 끝자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정은 바오로와 정베드로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1804년 단내에서 태어난 순교자 정은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자들의 지도자로 체포되었으며 남한산성에서 백지사(白紙死)형으로 순교했다. 그 후 두 아들이 시신을 단내성지로 모셔와 안장했다.
순교자 정베드로는 정은의 종손자다. 정은이 체포되자 감옥에서 병약한 할아버지를 돕고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해 스스로 관청을 찾아 체포됐다. 그는 정은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순교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순교터의 흙을 채취, 순교자 정은 묘 옆에 의묘를 조성해놨다.
두 순교자 묘소 뒤쪽에 위치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걸었다. 묵상과 기도, 5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문득 일전에 한 사제에게서 들은 ‘성가정은 모두가 함께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정’이란 말이 떠올랐다.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지인 단내 성가정 성지에서 가장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봤다.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간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 가정을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다. 누가 보는 것 마냥 얼굴이 붉어졌다.
김대건 신부가 사목을 위해 왔다 돌아갈 때마다 걸었다고 전해지는 ‘김대건 성인의 길’을 걸었다. 밤을 꼬박 새워 걸으며 몸을 아끼지 않고 신자들을 보살피던 그의 목자적 사랑이 느껴졌다.
그간의 신앙생활을 곱씹기에 이만한 장소가 있을까. 성지를 나왔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봄에 있어 소홀했다. 마음이 급했다. 오늘따라 무척 가족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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