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제 마음속의 고향입니다”
1963년부터 25년 한국 선교사로 헌신
“한국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큰 등불”
전문-성 바오로딸 수도회 수도자로서 사라 스케나(Sara Schena.70) 수녀를 모른다고 하면 그건 분명히 거짓말을 한 것이다. 1960년 서울 흑석동에 성 바오로딸 수도회 한국관구가 설립된 후, 1963년부터 1988년까지 25년 동안 한국의 선교사로서 헌신해 온 이가 스케나 수녀다.
70년 인생사에서 25년을 낯선 이국땅에서 봉사자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평범한 이들은 물론이요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쉽게 공감하고 행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본지는 ‘봉헌생활의 날’(2월 2일)을 맞아 사라 스케나 수녀를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첫날, 성 바오로딸 수도회 로마 총본원에서 이귀영(비올라) 수녀와 박미애(데레지타) 수녀의 도움을 받아 이뤄졌다.
심리학자 프랭크 베니에리는 ‘첫인상은 10초안에 결정된다’고 말했지만, 스케나 수녀의 첫 인상은 3초면 충분했다. 푸른 계열의 바오로딸 수도복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흰 피부에 작은 키. 너무 사랑스러워 볼이라도 만져주고 싶은 얼굴에는 칠순 노인이 걸어온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수줍은 웃음을 터뜨릴 때면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다. 마치 어린이 만화 속에서나 나올듯 한 꼬마 요정(?) 같아 보였다.
기자가 첫 인사를 영어로 해야 할까 이탈리아어로 해야 할까 망설이던 찰나, 수녀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스케나 수녀와 대화할 때는 외국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25년 동안 한국 땅에서 한국인들과 몸소 부딪치며 배운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일상대화가 가능하다. 지난 이야기부터 듣기로 했다. 그러나 한 평생을 수도자로서 살아오며 몸에 밴 겸손 탓일까. 그는 좀체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으려 했다. 인터뷰에 동석한 두 한국인 수녀의 다독거림에 힘입어 이야기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칭찬이 나오면 연신 손을 내저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 스케나 수녀가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지난 1962년. 초대 총장 수녀를 따라 한국을 방문했다가 미사보 쓰고 기도하는 한국인 신자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 한국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한국에 머물기로 결정하던 날 총장 수녀님의 질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힘들지 않겠는가’가 아니라 ‘부모님께 죄송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거든요. 당시만 해도 한국전쟁 후 한국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내가 과연 이곳에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였죠”
며칠간의 기도와 묵상 끝에 얻은 해답은 한국행이었다. 그리고 40일 동안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마침내 1963년 10월 11일 한국에 도착했다.
전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파란 눈의 외국인 수녀를 선뜻 반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수녀는 오전에는 연세대학교가 선교사들을 위해 마련한 한국어학당에 나가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본원으로 돌아와 한국어 복습을 하며 선교사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수녀는 문서선교를 위해 한국의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강원도 오지의 산골짜기부터 남도 끝 바닷가까지 웬만한 곳은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다 돌아다녔다. 세월이 흐르면서 청원자들을 지도하는 역할도 주어졌고, 서원의 제본소 소임도 맡겨졌다. 한국관구 본원장과 수련장도 지냈다.
스케나 수녀는 현재 로마 총본원 국제양성비서국에서 전 세계 바오로딸 수도자들을 위한 ‘카리스마 코스’를 책임지고 있다. 2007년 6월에는 서원 50주년 금경축과 고희연이라는 겹경사를 맞기도 했다.
스케나 수녀는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운데 유독 ‘한국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왜 외국인 수녀가 이렇게도 한국을 그리워할까. 지금 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싫어 이민을 떠난다는데.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인들의 천성에 자리한 ‘연대감’, ‘형제애’, ‘열린 마음’을 꼽았다.
“벌써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사무치게 그립고 눈에 선해요. 외국 사람인 나를 보고도 전혀 망설임 없이 ‘수녀님 수녀님 여기요’, ‘이리 오세요 오세요’ 하고 반갑게 손짓하며 부르던 신자들의 모습 말이에요”
외국인 수도자가 십 수 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당시 ‘신촌에서 몇 번 버스를 타고 안내양에게 짧은 한국어 단어만으로 내릴 곳을 물어 어디어디를 찾아갔다’고 설명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유창한 한국어로 입이 마르도록 한국을 칭찬하는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한국의 생활 중 힘든 일은 없었냐’는 기자의 우문에 그는 ‘자반고등어 먹기가 가장 힘들었다’는 현답을 내놓았다.
“저는 하느님께 저를 봉헌한 수도자입니다. 기뻐도 슬퍼도 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특별히 힘들 일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정말 주님과 함께 해도 자반고등어는 먹기가 힘들었답니다. (웃음)”
인터뷰 말미, 가장 기억나는 한국인이 있는지 물었다. 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박정일 주교(마산교구 은퇴)와 정의채 몬시뇰(서울대교구 은퇴), 성염 전 교황청 한국대사를 차례대로 꼽았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한국을 찾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한국은 제 마음 속 고향입니다. 한국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큰 등불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많이 받은 곳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사제, 수도자들의 끊임없는 성소와 믿음의 빛을 따르는 신자들의 모습에서 느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수도자로 살도록 이끌어 주신 것도 감사드리는데 하느님께서는 건강까지도 허락하셨다”며 “특별히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체험할 수 있었던 복된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나이 든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이력서와 같다고 한다. 미추(美醜)를 떠나 지나온 삶의 행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난 50년 간 국경을 넘나들며 한 평생 수도자로서 봉헌의 길을 걸어온 사라 스케나 수녀의 얼굴은 그 자체가 ‘봉헌생활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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