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보좌신부 시절을 마치고 주임신부가 되어 처음 부임한 곳은 대관령 주변의 작은 성당이었다. 나지막한 산 밑에 자리하여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산을 닮아 산처럼 순박한 교우들이 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제에게 ‘첫 본당’은 ‘첫 사랑’이라 마음으로부터 전심을 다해 그들과 하나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부족한 점도 없었고, 아쉬운 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족함이나 아쉬움이 무엇인지 조차 모를 만큼 사랑만이 가득했다.
부임한 첫 겨울에 본당 관할 내에 스키장이 새로 개장했다. 지난 주 이미 언급한 스키장에서의 악몽(?)이 기억 속에 있는 지라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주말만 되면 스키장으로부터 미사시간을 물어 오는 전화가 일상에 지장을 받을 만큼 빗발쳤다. 스키장에 놀러 와서라도 주일 미사는 거르지 않겠다는 교우들의 열심과 신앙이 결국 나를 스키장으로 불러냈다. ‘이럴 바에야 아예 스키장에 가서 미사를 하자.’ 그래서 나는 스키장으로 미사를 하러 가는 신부가 되었다.
우선 스키장의 협조를 얻어 미사 장소를 정하고, 스키장 숙소의 내부 방송을 통해 미사 시간을 홍보했다.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끼던 신자들도 차츰 적응하기 시작했고, 점차 입소문을 타고 ‘강원도 어느 스키장에 가면 주일 아침에 미사가 있다더라’하는 소식이 알려져 점점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수가 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한 겨울에 몇 번씩이나 미사에 나오셔서 안면이 생기는 교우까지 생겨났다. 스스로 전례자를 정해 미사 해설과 독서, 보편지향기도까지 알아서 챙기는 일종의 공소가 되어 갔다.
주일 아침이면 일어나 옷을 차려 입고는 스키장으로 갔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캄캄한 눈길을 헤치고 도착하면 스키장 직원이 인사를 하며 반겨 주었다. 처음에는 수단을 입고 나타나는 사제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그들도, 나중에는 다정한 동료가 되어 가끔은 미사 후에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넬 만큼 친근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신자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스키장에서 만나 함께 주일미사를 봉헌하게 된 것에 감사했고, 신앙인으로서의 일치감을 느끼곤 했다. 스키장의 하얀 풍경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미사였다. 스키장에 갈 때 마다 맨발로 스키장을 뛰어가던 일이 생각나서 속으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때 다리가 부러져 고생하던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목의 장(場)은 성당만이 아니다. 사목자는 교우들이 있고 기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사목자와 교우들이 만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목의 장이다. 그곳이 스키장이면 어떻고, 바닷가면 어떠랴. 몇 해 전 유럽의 어느 주교님께서는 젊은이들을 만나기 위해 디스코텍에까지 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만나시기 위해 장소를 불문하고 찾아 가셨다. 예수님을 닮은 이 시대의 사목자들 역시 교우들이 원하면 어디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사족 : 스키장에서 미사는 했으나 스키장의 악몽이 여전해 스키를 타지는 않았다. 지금도 스키를 탈 줄 모른다.
신호철 신부 (춘천교구 청평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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