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본당에 부임하여 초임 주임신부의 행복함에 젖어있던 어느 날, 낮 미사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오는데 성당 밖 좁은 골목길에 군인들이 가득했다.
때 아닌 풍경에 의아해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사제관으로 다가와 물 한 잔을 청했다. 보기에도 살벌한 무장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이유를 물으니 TV를 보라고 한다. TV를 보고서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무장 공비가 침투했다.
동해 바다에 침투한 북한 잠수함이 해안에서 좌초했고, 수십 명의 무장 공비가 산으로 도주했다. 우리 본당이 있는 지역은 그들의 도주로였고, 우리 군에서는 즉시 무장공비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들을 잡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졸지에 우리가 사는 마을은 실전이 벌어지는 군사 작전 지역이 되었다. 주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고 마을의 모든 일상생활은 정지되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실시되어 개미 한 마리 나다닐 수 없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찌감치 불을 끄고는 숨을 죽여야 했다. 성당 앞 초등학교 마당은 군인들의 막사가 설치되어 군영이 되었고, 한 낮에도 중무장을 한 차량과 군인들이 곳곳에서 경계를 섰다. 밤에 가끔 조명탄이 터지거나 총소리가 나면 정말 전장 한 가운데에 있는 공포가 엄습했고, 혹시라도 창문이 덜컹거리면 무장공비가 먹을 것이라도 찾아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쭈뼛 서곤 했다.
길어지는 군사작전으로 주민들의 생활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산 가까이 살던 사람들은 모두 시내로 나와야 했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아예 문을 닫아야 했다. 대중교통도 거의 마비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정상적인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성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행금지로 인해 저녁미사를 할 수 없으니 평일미사를 낮에 봉헌해야 했고, 몇 명 되지 않는 본당의 청년들은 모두 경계 근무에 동원되었다. 신자들 중 여럿은 아예 도시로 나가 버렸고, 본당의 여러 단체들은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을 위한 위문 활동을 나서기도 했다.
무장공비를 잡기 위한 군 작전은 몇 명의 희생자와 긴 피로를 남기고 그 해 겨울이 되어 온 산이 눈으로 덮히고서야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로인한 공포와 피해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상당히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피폐된 지역 경제를 다시 살리는 것 역시 꽤나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가 겪어야 하는 민족 분단의 고통을 고스란히 체험하면서 짓눌리고 답답한 마음은 아픈 기억이 되었다.
얼마 전 동해안으로 여행을 하던 중 그 때의 잠수함이 관광지에 전시되어 있고, 무장공비들의 도주로가 등산로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십 여 년 전의 그 무거운 기억이 되살아났다. 콜레라가 돌아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무장공비는 콜레라보다 더 무섭다’고 푸념하던 누군가의 말도 떠올랐다. 함께 사는 세상, 전쟁과 공포가 없고 분열과 다툼이 없는 세상, 남북이 일치하고 공생하며 통일로 나아가는 세상,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와 사랑이 흘러넘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신호철 신부(춘천교구 청평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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