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20살,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아직은 ‘사회’가 낯설고 두렵지만
학비 모아 꿈 펼칠 생각에 힘 생겨
2월 16일 오후 5시 경기도 안산시 외곽 와동의 자그만 벽돌건물.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직은 아이들’인 89년생 10여 명이 모였다. 오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위한 보금자리 ‘들꽃피는 마을’(공동대표 김현수 목사)에서 떠나는 아이들. 적게는 3년에서 길게는 6년까지 ‘들꽃피는 마을’에서 생활한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됐다’는 이유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사람과 떠나는 아이들의 눈에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일반 가정 아이들과 달리 이들에겐 ‘고등학교 졸업=독립’이다. 이제 갓 20살이 된 이들은 앞으로 이 험한 사회에서 말 그대로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이들에게는 “추운 날씨에 옷 든든하게 입고 다녀라”라고 말해줄 사람도, “식사는 제때 꼭 챙겨 먹어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늦게 귀가해도 “늦게 다니지 마라”고 걱정해 줄 사람이 없다. 그나마 이런 외로움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당장 갈 곳이 없다. 최근 평택에 위치한 한 공장에 생산직으로 입사,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됐다는 황희선씨.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서 등록을 포기해야 했다. 사회복지사가 꿈인 희선씨는 “25살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서, 꼭 다시 대학에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퇴사할 경우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주거 문제가 늘 걱정이다. 당장 마땅히 살 곳이 없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 직장에 오래 근무해야 한다.
그나마 희선씨는 생활할 공간이 있어서 나은 편. 허수연씨는 30만원 월세를 어렵게 구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간신히 돈를 메우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살얼음이다.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인 허씨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일단 돈부터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씨는 돈을 벌면, 연기학원에 가장 먼저 등록할 계획이다.
유치원 선생님이 되겠다는 이순동씨는 현재 보육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씨도 돈을 번 후에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할 계획이다. 임정택씨는 냉동관련 전문 기술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재태크에도 관심이 많다. 냉동 관련 직장에서 일한 뒤, 돈을 모아 사업을 하고 싶단다.
이재은씨는 몇몇 주위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안산시의 한 그룹홈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합격한 대학에도 다닐 수 있다. 세무공무원이 꿈. 하지만 다른 일반 대학 합격생들과는 각오부터 남다르다. “대학 등록금을 위해선 닥치는 대로 일해야지요. 음식점, 놀이공원 등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아르바이트를 다할 생각입니다.”
옆에서 수연씨가 “아르바이트로는 공장이 최고야 최고”라고 말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돈도 많이 벌고, 대우도 좋다는 것이다. 이미 공장 생산직으로 입사한 희선씨가 옆에서 손사래를 친다. “공장서 일하면 공부는 못해. 나도 잔업과 특근 때문에 밤 10시까지 일할 때가 많아.”
친구들이 잔뜩 호기심 발동한 모습이다. 옆에서 친구들이 “공장에서 일할 땐 무슨 옷을 입느냐” “공장 사장님은 좋으냐” 질문을 쏟아낸다. 예쁜 정장이 어울리는 희선씨가 친구들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했고, 아이들은 그 중요한 정보들을 귀담아 듣는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김현수 목사가 말했다. “여러분들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생활한 추억을 마음에 새기고,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주세요.” 보금자리를 떠나는 아이들은 목이 메인다.
“목사님. 그동안 저희들 보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착하게 살겠습니다.”
아이들은 아쉬움 때문에 차마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이날 저녁, 이들은 각자 주머니에서 꺼낸 2000~3000원씩을 모아 노래방에 갔다.
◎청소년복지시설 퇴소자들
40%가 회사 기숙사 생활
서울역과 수원역 등 최근 노숙자들이 몰리는 곳에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89년생 20살 새내기 사회인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복지시설 퇴소 후 주거환경이 불안해진 이들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수원지역자활센터 최봉명(바오로) 관장은 “청소년 복지시설에서 퇴소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법의 사각지대에서 놓여있으며, 주거 및 자립형태 또한 매우 불안정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2007년 6월 현재, 전국의 청소년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은 1만9000여 명. 그룹홈 생활 청소년 1000여 명, 가정 위탁 청소년 1만5000여 명 등을 포함할 경우, 요보호 아동은 3만7000여 명에 이른다.
이중 20살이 돼서 ‘대책 없이’ 사회에 내몰리는 이들은 매년 8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주거 문제로 인한 고통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통계에 의하면 이들은 대부분 회사 기숙사(39.8%)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그 다음이 전월세(28.9%) 친구나 지인의 집(8.5%), 자립지원시설(6.6%) 등의 순이었다.
물론 정부에서 자립 정착금(1인 평균 310만원)이 지원되지만, 별도의 생활비 지원 및 생활지도 프로그램이 없는 상태여서, 대부분 초기 정착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이 아닌, 물고기만 주는 시혜성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한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교회가 기존에 있는 정책을 활용해, 이들 청소년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건교부는 지난 2006년 8월 주택 공급에 관한 규칙을 개정, 복지시설 퇴소아동에 대해 영구임대아파트 입주자 선정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는 방침을 정한바 있다. 또 관계자들은 단신자용 매입주거임대사업 등 다양한 법적 장치들을 활용할 경우, 오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조기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최봉명 관장은 “교회가 나서서 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 임대아파트 주거 입주 권리를 찾아주고, 취업 등 자립 정착 프로그램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회복지법인을 갖춘 각 교구가 취업 및 주거 지원 프로그램, 사후 지도 프로그램 등을 통해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시설 퇴소자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 권장은 또 “복지시설 퇴소자를 방치할 경우, 어렵게 복지시설을 운용해 청소년을 돌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며 “복지시설 퇴소자 문제가 노숙자 문제, 빈곤층 증가 문제 등 다양한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만큼 이들에게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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