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포도밭 일꾼 되게 하소서”
한번 방문하면 반드시 다시 찾게 만드는 곳. ‘안성성당’이 바로 그런 곳이다. 혼자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지친 신앙인이 조용히 묵상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기엔 ‘안성맞춤’인 곳. 100년 넘은 그 역사의 현장, 안성을 찾았다.
성당을 둘러싼 포도나무 길 돌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
1901년 안성성당 초대 주임신부 공안국(孔安國, Gombert) 신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성당 마당에 무심코 심은 독일산 포도 묘목이 의외로 탐스런 과실을 맺은 것.
공신부는 안성 지역이 포도재배에 적합한 기후 및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고국(프랑스) 방문길에 포도나무 32종을 가져와 박숭병 당시 총회장에게 심도록 했다. 어렵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고자 했던 한 프랑스 선교사의 사랑, 이것이 오늘날 ‘안성 포도’의 효시다. 이후 안성하면 포도요, 포도하면 안성이 됐다.
경기도 안성시 구포동 80-1. 안성성당 측변에 심어진 포도나무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간다. 그 포도나무에서 1900년대 초 한국 농촌을 걱정하는 선교사들의 따뜻한 마음이 읽혀졌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십자가의 길과 포도나무 길을 한 바퀴 돌아 성당 정면에 서면 또 다른 색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주 전동성당 설계감독 및 명동성당 내부공사를 감독한 위돌박(Victor Poisnel) 신부가 설계 감독을 맡아 공사를 진행, 1922년 봉헌한 성당.
이색적이다. 이런 성당을 만난 경험이 별로 없다. 전반적 분위기는 전통 서양 교회건축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옆으로 돌아서면 전혀 다른 모습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한옥의 모습이다. 서양 가톨릭교회 건축 양식과 한국 전통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절충식 건물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신앙에서 오는 ‘익숙함’과 한국인만 느낄 수 있을 법한 ‘편안함’이 동시에 다가온다. 게다가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이 아닌가.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 82호. 건축학자들은 이 성당을 두고 종교 건축 토착화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건축양식이라고 입을 모은다. 성당 건축사 연구에서 ‘안성성당’이 빠질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옛 안성성당의 면모는 ‘속’에서 더욱 빛난다. 목재로 이뤄진 성당 내부 공간도 사뭇 이색적이다. 최근 성당 건축이 제대 주변에 자연채광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이라면, 안성성당은 이와 정반대 길을 걷고 있다.
익랑의 끝을 제대 전면부에서 끊어지게 해 옆창과 위창의 빛을 극도로 제어했다. 제대는 성당의 여타 창문 빛에만 의존하고 있다. 기도를 돕는 은은한 빛이 성당 안에 가득하다.
100년을 넘어 다시 100년으로
신자 5명이 성당으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소문을 듣고 왔다고 했다. 서울 신자들은 성당에 앉아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저절로 기도가 되네요.” “이런 성당,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에요.”
목재 소재의 친근함, 그리고 자연 채광의 절제가 가져온 효과였다. 성당을 나와 문앞에 서면, 성당 부지가 한눈에 보인다. 그 오른편으로 2000년 10월 3일 봉헌된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옛 안성성당이 ‘과거’라면, 100주년 기념성전은 ‘현재’다. 철저히 현대식 건축양식을 따랐다. 윤성호(자카리아) 한서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설계한 지하 1층, 지상 2층 안성성당은 옛 성당과 절묘한 신구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옛 성당에선 ‘빛의 은은함’이 느껴진다면 100주년 기념성전은 오히려 ‘빛의 흐름’을 강조했다.
제대 위 사각형 창을 배치, 말씀을 뜻하는 빛의 생명력을 강조했고 성당 입구 상부 벽에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사각형 창을, 신자석 옆에도 창을 두었다. 최근 많이 채택되는 ‘노출 콘크리트기법’으로 외벽을 처리한 것에서도 ‘현재’가 느껴졌다.
100주년 성당 옆으로 본당 설립 200주년을 향한 ‘미래의 십자가’가 설치돼 있다. 총길이 18m에 무게만 13t에 이른다. 그 무거움에서 ‘100년을 넘어 다시 100년’으로 향하려는 신앙 후예들의 진중한 각오가 느껴졌다.
안성성당에서 안성터미널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다. 터미널에서 20여 분을 기다려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안성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어느 한 ‘포도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포도원….
성경에서 읽은 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태오 복음 20장 1∼16절. 성경은 하느님 나라를 포도원에 비유했다. 포도의 고장에 위치한 안성성당, 포도원으로 둘러싸인 안성성당이 멀어지고 있었다. 차는 다시 세상사는 일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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