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형성의 모델’로 삼아야
태초부터 시작된 인간의 교만 ‘형성’ 걸림돌
‘중심’을 어디 두느냐에 따라 우리 삶도 변화
건물에는 기초가 중요하다. 기초가 약하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또 건물의 무게중심이 흔들리면 건물 모두가 흔들리고 불안정 하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의 중심이 바로서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남대문이 불타 무너져 내리듯이 그렇게 모두 부서진다. 그 때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주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목전에 닥치면, 결국에는 내가 나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결국에는 ‘나’가 중요한 것이다. 그 ‘나’를 잘 가꾸는 것이란 다름 아닌 지난 주에 말했던 주어진 ‘토대’를 잘 갈고 닦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기름진 밭이 있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잘 가꾸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 원래 주어진 토대는 맑고 영롱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맑고 영롱한 토대를 잘 간수하지 못하고 잘 형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토대에 때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존심(Pride)이 문제다. 프라이드에는 자긍심, 자부심, 만족감이라는 뜻도 있지만 자만, 교만, 오만, 자기자랑, 거드름이라는 뜻이 강하다.
이 교만의 역사가 바로 구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은 세상을 보기 좋게, 아름답게 창조해 놓으셨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이 이 참 좋은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가 잘못한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 이래로 죄는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난다. 아담과 이브는 사람(생명)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아들에 내려와서는 살인이 벌어진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마침내 노아 시대에 이르면 세상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할 정도가 된다. 때가 피부 밖에만 조금 낀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까지 들어와 속속들이 썩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나는 잘 났다’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보자. 우리도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내면 깊숙한 곳까지 썩어 들어가는 그런 경험 말이다. 어떤 때는 나 자신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다른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다. 미워하면 헤어 나올 수 없다. 끊임없이 미워하게 되고 결국에는 나 자신의 영혼도 좀먹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문제들을 속속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다.
하느님께선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부터 늘 인간에게 바르게 살 것, 당신이 인간 속에 심어주신 영적, 정신적, 육신적 토대에 걸맞게, ‘형성의 원리’(인간 마음에 미리 형성해 주신 모든 원리)에 입각해 살아갈 것을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하느님은 여기서 실망하지 않는다. 참으로 인내가 많으신 분이다. 그래서 수많은 판관과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그것도 모자라 인간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서와 코헬렛 등을 섭리하셨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알아듣지 못한다. 율법학자들은 율법학자 나름대로 점점 거드름만 피우는 지도자로 바뀌어 갔다. 백성들은 또 그들대로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맘대로 살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속속들이 썩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은 더 이상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성자의 모습으로 내려오신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내면에 만들어나가야 할 전형적인 하나의 ‘형성의모델’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중심, 우리들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로 이 땅을 디디고 살으셨던 분이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성체 등과 같은 것이 깊숙이 배어 있을 때 진정으로 우리들의 삶을 회복할 수 있다. 물론 흰색 프라이드 자동차도 조금만 운행을 하다보면 검은 때가 끼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깨끗하게 내면을 씻은 다음 늘 나 자신을 형성적으로 성화시키며 살아가야 한다.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성적 에너지가 자꾸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의 교만, 인간을 망치는 프라이드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을 이 짧은 글에서 이렇게 단순화한다는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을 보는 눈과 삶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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