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복음살이]
불의에 맞서는 삶은 ‘그리스도인 소명’
왜곡된 현실에 대한 침묵은 그리스도적 삶과 무관
현 질서 쇄신·공동선 실현 위해 선거 적극 참여를
“천주교 신자들은 정치에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정치도 사회활동의 하나인데…. 교회도 결국 사회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나가야 하잖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4월 9일)가 코앞인데도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는 교회 안팎의 모습을 보며 김석주(베네딕토·39)씨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난 2000년에 치러졌던 4·13 총선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시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각계각층의 신자들로 구성된 ‘천주교 총선연대’가 전국에서 100개가 넘는 성당을 중심으로 ‘부적격자 자진 사퇴와 선거법 개정을 위한 그리스도인 서명운동’을 펼쳐 3만여 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뒀던 게 그리 먼 과거가 아님에도 까마득한 일로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IT 업종 대기업의 중견간부인 김씨는 회사 동료들은 물론 간간이 있는 본당 신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더 큰 답답함을 느낀다. 정치나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진 게 없음에도 신자들 사이에서는 정치 자체를 회피하거나 터부시하는 경향마저 보이기 때문이다. 8년 전 이맘 때 정치를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벼르던 자신과 같은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며 김씨의 고민은 깊어진다.
“정말 정치라는 사회활동 영역에서 교회와 신자가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정치와 종교 현실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는 ‘종교와 정치는 무관하다’는 류의 인식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1970, 80년대 암울한 독재시절.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며 민주화운동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면서 신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신망을 얻었던 한국 교회는 어느 때부터인가 ‘정치적 의사 표현이 더딘 종교’라는 의도하지 않은 꼬리표를 달게 됐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현실에 비해 개신교를 비롯한 타종단의 재바른 모습은 일반 신자들의 의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면도 없지 않다. 다른 종단 가운데는 정치적 분수령마다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 자신의 의사를 정치적 공간에서 실현할 후보를 내놓는 곳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일찌감치 나선 통일교는 이미 지난해 8월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해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총선 슬로건을 내걸고 이번 총선에서 전국 245개 선거구 전체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가정당은 ▲가정이 행복한 나라 ▲도덕정치 구현 ▲통일 한국 건설을 주도하는 가정당 등 3개 분야 12대 공약을 발표하고 ‘가족행복특별법 제정’을 실현하겠다며 국민들 사이를 파고들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적인 개신교 교단이 모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목회자 3만 명을 중심으로 지난 2월 29일 개신교 정당인 ‘기독사랑실천당’(기독당)을 창당했다. 이어 3월 10일 전국 245개 지구당 책임자를 임명하고 본격적인 총선 참여에 나서고 있다. 개신교 정당의 탄생은 개신교 신자 가운데 84%가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해줄 정당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의 정치세력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금까지 줄곧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해온 보수적인 개신교계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특히 지도급 인사들이 기독당에 직접 참여하거나 지지 의사를 밝혀 개신교의 정치 참여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개신교의 한 유력 인사는 “한국 개신교가 유망한 평신도 인재들을 발굴해 성경적 가치관으로 양육하고 사명감을 심어줘 바른 지도자가 되도록 뒷받침하는 등 그리스도인 리더 양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서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치, 주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정치를 실현시켜 국민에게 믿음과 소망 그리고 비전을 제시할 참된 그리스도인 정치인과 정당이 요청된다”고 밝혔다.
종교를 둘러싼 정치 현실이 이렇듯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몇몇 교구에서 교구장 담화 등의 형식을 빌려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마저 정치판에서 그리스도적인 정신이나 자신의 신앙과는 무관한 선택을 강요받는 처지에 놓여있는 모양새다.
정치는 희망을 만드는 도구
교회가 걸어온 길이 매 시기 그리스도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인류에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을 전해온 역사라고 할 때 정치는 이런 희망을 만드는 도구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라는 도구로 세상에 함께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우선적으로 택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적인 문제이기에 정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주님이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는 숱한 부당한 선택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도 보편적인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이뤄나가도록 노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국민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는 정치인들의 야합과 그에 편승한 집단들의 이기주의가 판치는 현실 속에서 세상이 불의한 힘에 의해 왜곡되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적인 삶에 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제76항).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꾸준히 사회참여에 대한 원칙과 가르침을 제시해오고 있다. 사목헌장에서 교회는 인권 침해, 고문, 빈부 격차 등 불의를 비판하는 활동을 정치 이전에 복음화를 위한 활동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불의한 상황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지지하는 정치행위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사목헌장은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 제정, 국가의 통치, 여러 기관의 영역과 목표 설정, 통치자 선거 등에, 모든 국민이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능동적으로 더 잘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을 제공하는 정치적 법률적 구조의 창안은 인간 본성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75항)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교회는 “정치 참여 자체는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사항”(지상의 평화 73항)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고유 소명을 의식하여야 한다. 확고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공동선의 함양에 진력하여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사목헌장 75항)며 정치 참여가 신자들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미래의 도전들-대변혁 시대에 가치를 지닌 것들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정치는…이성이 지닌 도덕적 통찰력이 마비되어 암울한 상황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라며 정치 안에서 신자들의 역할과 깨어있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적 관점에서 보면 선거는 광역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의 생명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의와 평화, 공동선의 증진에 기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임을 재확인하고 정치 참여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인식을 지닐 필요가 있다.
선거, 그리스도 정신 구현의 장
총선이라는 건너지 않으면 안 될 물줄기를 앞에 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해는 쉽지 않은 선택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이번 총선은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비롯해 사회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양극화, 사형제도, 한·미 FTA 등 국가의 미래와 관련한 중요한 사안들이 격돌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실체마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어 선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민주적 제도가 도입된 이래 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정치에 참여해왔다. 가톨릭 대표를 선거에 내보내는가 하면 범교회적인 지지를 통해 신자 후보의 당선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이렇게 정계에 진출한 신자 정치인들이 앞장서 혼인의 순결 및 가정의 건강에 관한 국가의 보호 의무와 인권 보장 등 가정과 사회의 건강함을 지키기 위한 교회의 가르침을 헌법을 비롯한 각종 제도에 반영시킨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교회는 최고의 정치 행위라 할 수 있는 선거가 현세 질서의 쇄신과 변화를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일 뿐만 아니라 공동선 추구와 실현을 위한 도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신자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 한가운데 서길 요청받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당시의 문제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세상 한가운데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교회는 이 길에서 가난한 이들을 찾고 이들과 함께 하려는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선량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들려주고 있다.
사진설명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올바른 선거참여와 국민주권 회복을 위한 천주교총선연대’(천주교연대)가 발족,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시민들에게 서명운동을 펼쳤다.
▶제17대 총선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투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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