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이룬 만학의 꿈
이젠 훨훨 펼칠래요
야학(夜學). 사전을 보면,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실시하는 비정규적 사회교육 기관’으로 정의된다.
요즘도 야학이 있나? 물어볼 수도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일련의 교육과정 속에서 더 좋은 학교에 가길 바라지, 그러한 당연한(?) 과정도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한다.
명문학교, 명문대를 꿈꾸는 사회 속에서 뒤늦게나마 놓쳐버린, 허락되지 않았던 ‘배움의 꿈’을 이루려는 이들의 열정을 들여다봤다. 용기있게 배움의 길에 나선 이들을 만나러 안동 ‘마리스타 야간학교’를 찾았다.
어둑어둑해질 저녁, 시내에 자리한 야학 건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학교로 들어서는 문을 찾기는 어려웠다. 한사람 겨우 들어갈만한 문. 소설의 제목인 ‘좁은 문’이 떠올랐다.
# 저녁 7시, 1교시 시작 종이 울리다
좁은 문을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는 이들이 눈에 띈다. 교실에선, 먼저 온 학생들이 지난 시간 배운 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양해를 구하고, 중등 2반 수업에 들어갔다. 카메라를 멘 기자의 모습에 다들 불편한 얼굴들이다. 조심스럽게 교실 뒤에서 수업을 지켜봤다.
야학 교감을 맡고 있는 김헌택(제준 이냐시오, 안동중앙고) 교사의 영어수업 시간이다. 현직 교사답게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명쾌한 열강이 이어졌다. “high의 비교급은 higher이죠. 뒤에 er이 붙습니다. 기억하세요.”
오늘의 주제는 ‘비교급’. 학생들은 문장이 정리된 프린트물에 하나라도 놓칠세라 설명을 받아적기 여념 없다.
“오늘 수업이 조금 어려우시죠. 다음달 검시를 앞두고 중요 문장들은 익혀야합니다. 자~ 다시 한번 해볼까요.”
수업이 시작하고 20분쯤, 한 학생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4월 13일 고입 검정고시를 앞둬서일까? 긴장감 속에서 50분간의 수업이 끝났다.
# 쉬는 시간, 학생들을 만나다
야학에 오는 이들은? 중등 2반 수업을 함께하며 느낀 학생들에 대한 궁금증이 가셨다.
수업 중간에 들어온 학생은 청송 주왕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데, 매일 저녁 식당문을 닫고 안동까지 달려온다. 그리고 40∼50대 주부들 사이에서 눈길을 끄는 학생이 있었다. 70대 중반의 윤옥희 할머니. 초등반에서 한글부터 시작해서 초등과정을 마치고, 고입 검정고시만 네다섯번 쳤다고 한다. 시험에 계속 떨어지다보니 4년째 중등 2반이다. 그래도 고등반을 향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마리스타에는 현재 안동 뿐 아니라 의성, 예천, 영주, 청송, 문경에서 초중고등과정을 배우러 80여 명이 찾아온다. 예전 70~80년대 야학과는 달리 대부분 주부, 할머니들이다. 다들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워하다보니, 인터뷰하기도 조심스러웠다. 2006년부터 마리스타에 나온 장필순(54) 학생과 어렵사리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나이의 엄마들은 다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죠. 까만 치마에 새햐안 칼라의 교복을 입는 것이 꿈이었죠.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못배운 한을 풀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요. 이곳 마리스타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에요. 자식 또래인 선생님들이지만, 존경스러운 마음에 날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해요. 학교에 나오는 시간이 행복하고,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개신교 신자로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는 그의 꿈은 대입 검정고시까지 합격해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가는 것이다.
옆 교실 학생들도 만났다.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가 반긴다. 예천에서 농사일을 하는 권덕순(71) 할머니는 “공부하는 재미에 쏙 빠졌다”면서 하루빨리 중등 1반으로 올라가고 싶단다. “예천 읍내에서 집까지 택시비만 6천원이 넘는데, 차비를 너무 많이 써서 미안한 마음에 농사일을 더 열심히 한다니까. 촌에서 온다고 뭐라할까봐 곱게 단장하고 나오니더.”
초등 1반 학생들은 어떨까? 쉬는 시간인데도, 받아쓰기 연습이 한창이다. 지난해 9월 입학해 한글 배우는 재미에 쏙 빠졌다는 김정남 할머니(70)는 “좀전에 받아쓰기 시험을 쳤는데, 받침이 2개 틀렸어. 아이고 아까워”라며 10칸 공책에 또박또박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 교장실에서, 마리스타의 현재를 듣다
야학의 책임을 맡고 있는 손루시아 교장수녀와 1996년부터 야학의 버팀목이 되어온 김헌택 교감선생을 만났다.
김헌택 선생이 먼저 운을 뗀다. “사실 없어져야 할 학교입니다. 정규 교육과정이 누구에게나 주어졌다면 말이죠. 하지만 아직도 배움의 길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이들이 아직도 주위에 많음을 인지하고, 당당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했으면 합니다.”
손루시아 수녀가 마리스타의 현재 모습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털어놓는다.
“여기 오는 이들은 심리적으로 죄인인 듯 숨어서 공부합니다. 학생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해 늘 아쉽죠. 무엇보다 떳떳하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교육은 평생해야 하는 것인 만큼, 각 단계별로 배움에 대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평생교육센터로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1977년 마리스타교육수도회에서 기술전문교육원으로 문을 연 마리스타 야간학교는 98년부터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에서 운영을 맡고 있다. 3월과 9월에 입학식을 갖고, 4월과 8월 두차례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초등 1, 2반과 중등 1,2반, 고등반으로 나눠져 있으며, 현직 교사, 직장인, 대학생 등 50여 명이 교사로 활동한다.
# 3교시, 교무회의가 시작되다
2층 교실에서는 마지막 3교시 수업이 이뤄지고, 9시30분 교무실에서는 교무회의가 열렸다.
매주 목요일마다 각 담임 교사들이 모여 학교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데, 오늘의 주제는 교실 ‘환경미화’.
“환경미화는 3월 27일입니다. 각 반의 개성이 드러나게 준비해주십시오.” “담임 선생님이 하기보다는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어떨까요.” “시간표는 좀더 눈에 띄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야학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7시부터 10시까지. 그저 의미없이 흘려버릴 수 있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행복이 되고, 맺힌 응어리를 풀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밤 10시, 처음 학교에 들어섰던 ‘좁은 문’을 나섰다. 고개를 숙이고 나와야하는 좁고 작은 문. 마리스타 학생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듯 했다.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 배우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숨어서 숨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인식부터 바꿔야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는 배움의 길에 들어서고자 희망하는 이들이 있기에.
사진설명
▶손루시아 교장 수녀가 2교시 후 쉬는시간, 초등반 교실을 찾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환하게 밝혀진 마리스타 야간학교 간판.
▶마리스타 야간학교에서 초등반 수업을 듣고 있는 한 할머니 학생이 쉬는 시간에도 덜 푼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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