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연한 자세로 묵묵히 ‘고난의 길’ 가다
성 금요일 사형집행 요청…세례 준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형무소에서 마지막 미사 봉헌…언론들 “엄숙함에 감동”
순국 직전까지 ‘아시아의 평화’ 기원하며 의연한 자세 보여
안중근(토마스) 의사 연구의 권위자인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아우구스티노?80) 원장이 안의사 순국 98주기 하루 전인 3월 25일 공개한 자료는 우리 민족사는 물론 교회사를 올바로 세워나가는데 새로운 디딤돌을 더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안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은 3월 26일까지의 마지막 행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죽음을 앞에 둔 신앙인 안중근의 면모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자료에 따르면, 안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고 곧바로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를 불러달라고 청해 고해성사를 받고 수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사를 드리는 등 이미 신앙적 결단이 바탕이 된,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길을 걸어갔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안의사의 마지막 발걸음을 재구성해본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다
오전 10시30분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일본 당국의 특별 허가를 얻어 뮈텔 주교(당시 조선대목구장)에게 전보를 보내 신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2월 17일, 사형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하다
안의사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재판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 한 행동을 살인범으로 몰아 심리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해할 뿐이다.
동양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나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례를 준 조제프 빌렘 신부(당시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가 곧 이곳에 오므로 천주교 신자로서 기념스러운 3월 25일(성금요일)에 처형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3월 7일, 빌렘 신부 도착하다
여러 곡절 끝에 빌렘 신부가 도착했다. 그는 재판부가 안의사의 고해성사를 허락한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고해성사가 신부와 신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일이며 이 때문에 모든 일이 당국의 입회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형무소법과 충돌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3월 8일, 빌렘 신부와 만나다
오후 2시 빌렘 신부는 안의사의 두 동생과 함께 법원 당국의 양해 하에 형무소를 찾아 3년 만에 안의사를 다시 만났다. 빌렘 신부는 죽음을 앞둔 신자로서 해야 할 바를 알려주고 다음날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고 돌아갔다.
빌렘 신부는 위로의 인사를 하고 자기가 온 이유에 대해 “몇 번이고 여기 오는 것을 주저했으나 너와 두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여순 법원의 특별 면회허가가 났다는 전보를 받고 여러 차례 반복해 고려한 끝에 원래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천명을 받들 나는 국가나 정치에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공명정대한 것만을 생각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느끼고 만난을 제치고 여기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빌렘 신부는 “당국의 허가를 얻었으니 고해성사를 올려 하루속히 죄의 사함을 청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네 큰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고 4시20분 안의사에게 기도를 하고 떠났다. 면회 중 빌렘 신부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껴안는 것 같은 태도로 안의사를 대하고 안의사는 어디까지나 경모하는 기분으로 시종일관 말을 들었다.
3월 9일, 고해성사를 하다
오후 2시에 시작된 고해성사는 (안의사가) 백지 20장에 걸쳐 적은 내용을 읽어가며 20분간 진행됐다. 빌렘 신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고, 안의사도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해를 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신부 외에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빌렘 신부는 그렇게 진지하고 생생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의사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밝혔다. 일본 관리들이 고해성사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물었으나 빌렘 신부는 일체의 내용을 밝히길 거부했다.
빌렘 신부는 “사형집행이 25일이라고 하는데 혹은 27일이라는 설도 있어 분명치 않으나 25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므로 만일 그날 저녁 6시에 형이 집행된다면, 천주교 신자가 죽는데 있어서 이처럼 좋은 날은 없겠지만 27일은 예수님이 부활한 날이어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중요한 날로 부활절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으므로 만일 27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고의로 나쁜 날을 택한 것이 되어 세계 여론을 두려워하여 이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3월 10일, 지상에서의 마지막 미사
형무소 교회당에서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가 봉헌됐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는 안의사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교회당 안에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참가자들도 미사의 엄숙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3월 25일, 동생들과 면회
이날로 예정됐던 사형집행일은 순종의 생신인 건원절이었다.
국제적으로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국왕탄신일에 사형 집행하는 일이 없고 한국에선 의병투쟁이 심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는 대한황제의 생일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국제?국내적으로 곤란한 일이 야기되므로 피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사형집행은 25일에서 26일로 연기된다. 이를 모른 안의사는 간수가 문을 여니 사형을 집행하는 줄 알고 나왔는데 뜻밖에도 두 동생이 면회를 와 있었다.
안중근은 우선 노모의 안부에 대하여 두 동생에게 부탁하며 평소에 아들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효도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번 사건으로 매우 심려를 끼친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고, 장남 베네딕토를 장래에 신부가 되도록 길러달라고 하였다. 실은 차남이 중병이 걸렸을 적에 뜻밖에도 하느님의 가호로 회생한 것을 생각하여 차남을 신부로 되게 하려고 생각했었으나 몸이 약해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장남을 신부로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또한 정근에겐 “너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라. 한국은 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돈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업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꼭 공업에만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무 심는) 식림 같은 일은 한국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므로 식림에 종사하여도 좋다”고 말했다.
안중근은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미즈노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동정(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당신의 뜻이 길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며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니 깨끗이 형에 따르고 빨리 천국에 가시기를 바란다. 천국에서는 언어에 지장이 없을 테니 나도 뒤에 천국에 가면 당신과 손을 잡고 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안중근은 “귀하가 이처럼 동정하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은 외국에 가는 것과 같아서 일정한 법이 있다. 모름지기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다면 천국에서 같이 손을 잡고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다”고 신앙을 권유했다.
간수에게 이제 더 할 말이 없다고 하니, 감옥장이 마지막 악수와 기도를 허락해 안중근과 두 동생은 기뻐하여 손을 잡고 악수한 뒤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오후 3시30분의 일이다. 이날 안중근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역시 마지막 면회는 서로의 작별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3월 26일, 주님 품에 안기다
살인 피고인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오전 10시 감옥소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과 소관 등이 사형장 검시실에 앉고 안중근을 불러들여 사형집행의 뜻을 전하고 유언의 유무를 물은 데 대해 안중근은 별로 유언할 것이 없으나 자기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간수로 하여금 명령하여 백지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하니 안중근은 2분여 묵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간수가 데리고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의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를 조금 넘은 4분이며 15분에 이르러 감옥의가 시체를 검사하고 절명하였다는 보고를 하기에 이르러 이에 집행을 끝내고 일동 퇴장하였다.
10시20분 안의사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에서 새로 만든 침관에 담아 흰 천을 덮고 교회당으로 옮긴 뒤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세 명을 끌어내 특별히 예배를 하게끔 하였다. 오후 1시 감옥의 장지에 이것을 매장하였다. 이날 안중근의 복장은 어젯밤 늦게 고향에서 온 명주로, 한복 저고리는 흰색, 바지는 흑색을 입고 가슴에 십자가를 달았다. 그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종용 자약 떳떳하게 그 죽음에 이르렀다.
사진설명
▶사형집행 직전 어머니가 마련해 준 흰색 한복을 차려 입은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날인 1910년 3월 25일 두 동생 정근?공근(왼쪽)을 만난 자리에서 빌렘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의사는 “죽음은 영원한 것이어서 걱정할 것 없다”며 의연한 자세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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