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성모님께 봉헌합니다
여느 시골 동네처럼 한적한 풍경이 펼쳐진 가운데 발을 쳐다봤다. 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 옛 선배 신앙인들의 신발 역시 이랬을 게다. 고개를 들어 다시 발을 옮겼다. 언덕 위에 있는 성당.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며 맞아주셨다.
1888년 경기도 첫 본당되다
왕림성당(주임 조성웅 신부). 1888년 7월 본당으로 설립된 곳. 역사가 말해주듯 유서가 깊은 곳이다.
속칭 ‘갓등이’로 알려진 이곳은 병인박해(1866년)를 전후해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명일기에 수록된 최야고보와 한안드레아 등 2명의 순교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왕림리는 박해 때 전교여행을 다니는 선교사들이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남의 눈에 띄지도 않고 교우촌이었기 때문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앵베르 주교도 1839년 기해박해때 이곳 공소에 은신했다고 한다. 공소였던 이곳은 1888년 한수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됐다.
당시 관할지역은 수원군(현 화성군), 용인군, 안성군, 평택군 등 네 군과 24개의 공소, 신자수는 1790명에 달했다.
또 지역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한문 서당인 삼덕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신명의숙, 왕림학원, 왕림강습소, 봉담 고등공민학교, 광성초등학교 등으로 학교 이름이 바뀌는 가운데 지역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교세 확장으로 미리내, 북수동, 발안, 남양 본당 등을 분리, 설정하기도 했다. 1927년 10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최초로 본당에 파견됨으로써 본당의 전교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곳 교우들의 신앙생활 역시 열성이었다. 1892년 본당 주임 알릭스 신부는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주교에게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짚신을 삼는 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일 정도로 이들은 지독히 가난합니다. 그런 이들이 요즘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 가는 노자를 마련해,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주교님을 뵙기 위함입니다. 이들의 순박한 믿음에 매일 감탄하고 있습니다.”
1963년 수원교구 설정과 함께 본당이 교구에 편입되었으며 순교자의 모후 소년 쁘레시디움 등을 창설하며 사목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신앙 선조 본받아 오늘을 산다
1987년 1월 본당 설정 100주년 본당 개혁 운동을 전개했고 이듬해 11월 1일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식 및 성당 봉헌 미사를 거행했다. 성당 옆에는 ‘박물관’ 간판을 내건 건물도 있다. 이곳에는 초기교회 전례용품과 제대, 묵주 등 5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본당의 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까지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지난해 본당은 설정 120주년을 기념하며 기도문을 봉헌했다. ‘저희 자신과 가진 것을 모두 바치며 온전한 사랑으로 저희 가정과 조국을 성모님께 봉헌하나이다. … 성모님 이 봉헌대로 살고자 하는 저희는 세례 때와 첫영성체 때에 한 서약을 오늘 다시 새롭게 하나이다….’
종현(현재의 명동, 1882년 설립), 원산(1887년 설립)성당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성당이자 수원교구의 뿌리인 왕림성당.
이곳의 신자들 역시 신앙 선조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고 있는 듯 했다. 되돌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앙인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현재. 신앙 선조들에게 그저 고마웠다.
그리고 다시 내려다봤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옛 신앙 선조들이 밟았던 그 땅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성당 문을 나서며 그저 마음 속으로 말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 문의 031-227-6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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