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 찾기 위해 ‘재형성’ 하라
세상과 ‘주고 받으며’ 하느님 주신 초월성 형성
지속적 쇄신으로 과거 반성하고 주님 뜻 찾아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옷을 직접 만들어 입고, 직접 벼농사를 짓고, 직접 가축을 키우고, 직접 텔레비전을 만들고, 직접 자동차를 만들어 타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이웃과 늘 복잡하게 서로 얼기설기 얽혀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주고 받는다는 것은 ‘나’가 아닌 ‘타인’ 혹은 ‘타 존재’를 전제로 한다. 부부 관계도 주고 받을 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늘 주기만 하는 아내, 혹은 남편, 늘 받기만 하는 아내 혹은 남편이 있다면 그 부부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주고 받는 관계는 심지어 나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자연에서 주는 열매나 공기가 없으면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 매일 집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지만 때로는 집 구석구석을 청소해야하고, 성당에서 편안하게 묵상을 하며 기도를 하지만 성전 건립을 위해 성금도 내야 한다. 결국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세상과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늘 주기만 하는 것이 있다. 태양과 달을 생각해 보라. 태양은 인간으로부터 받는 것이 없다. 공기는 어떤가. 우리가 공기에게 주는 것이 있는가. 바다도 우리에게 주기만 한다. 최근 이소연씨가 우주에게서 ‘경이롭다’고 외친 그 ‘지구’도 우리에게 늘 주기만 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자연과 함께 또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 있다. 바로 초월적 역동성(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활기찬 기운)이다. 이 초월적 역동성은 우리가 온전하고 완전하게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문제는 이런 선물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응답(주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혹시 우리는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인색한 구두쇠는 아닌가. 자연이 늘 우리에게 주기만 한다고 해서 자연에게 응답하고 자연을 돌보지 않으면 인간 삶은 이내 환경 파괴로 망가지고 만다.
하느님과의 관계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서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의 힘을 계속 보내주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니까, 삶이 힘들어지고 불행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허전해지고 자꾸 다른 유혹에 빠지게 된다. 성당에 가서 충만한 하느님의 선물을 느끼는 것이 재미가 없으니까 산과 바다, 강으로 여행을 간다. 충만한 선물에서 오는 행복을 맛보지 못하니까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을 억압한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주고 받으며 함께 하느님께서 본래 우리에게 심어 놓으신 초월성을‘형성’해 나아가야 한다. 형성은 ‘네 꼴은 네 꼴이고 내 꼴은 내 꼴이다. 네 꼴과 내 꼴이 함께 잘되어야 한다’는 차원이다.
여기서는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가 아니다. 주고 받아야 한다. 서로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양성은 다르다. 양성은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주고 받는 삶을 알아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주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받는 자리가 아니다. 서로 소통하며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는 부부와 부모 자녀간, 이웃간, 종교간 모든 문제로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은총을 통해서 끊임없이 (당신의 뜻에 맞는 인간으로) 형성되고 또한 지속적으로 재형성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의 원천과 기원을 하느님이 우리가 성취하도록 의도하시는 그러한 존재로 초월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받고 주며(응답하고)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애초에 형성하신 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내 꼴’이 되어야 한다. 내 꼴이 강아지 꼴, 돼지 꼴이 되어서는 안된다. 내 꼴을 잘 못 만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내 꼴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으면(형성하지 못했으면) 이제 부터라도 내 꼴을 다시 만들어야(재형성) 한다.
여기서 내 꼴을 다시 만든다는 것, 재형성 한다는 것은 개혁이고, 쇄신이다. 인간은 나약하다보니 잘못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은 없다. 재형성은 궁극적으로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뤄진다. 하느님께서 애초에 나를 형성되게 하신 그 무엇을 향해 눈과 귀, 마음을 열어야 한다. 형성의 신비를 깨달을 때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재형성을 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지속적으로 재형성되어야 한다. 과거의 부족했던 삶을 반성하고 계속 하느님의 뜻을 찾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재형성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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