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총대리 이용훈 주교
소유한 돈·정신적 재능 이웃·사회 위해 활용을
재물의 양면성, 그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기능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청년 실업, 기업의 수출부진, 감원에 따른 조기퇴직과 명예퇴직, 유가상승과 경제침체에 의한 고물가와 저성장의 가속화, 중산층 붕괴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상대적 빈곤의식은 하위직 노동자와 빈곤층을 더욱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빈부격차는 유사이래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이가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제도가 가능한 것인가? 이미 70년간의 공산주의 실험에서 공산제도는 허구임이 드러났다. 예수님은 사유재산 제도에 기초를 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았고, 그런 제도를 존중했다. 그래서 타인의 것을 탐내고 강탈하며 탈취하는 것이 죄스런 행동인 것이다(마르 7,20~23; 마태 5,27~28; 15,18~20 참조).
빈곤은 자체로 악(惡)이다. 빈곤은 사람을 비인간적 상황에 몰아넣기도 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며 분쟁과 싸움에 휘말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성경도 극도로 가난한 자는 도둑질을 쉽게 감행하며, 주님의 이름을 오염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잠언 30,9 참조).
그렇다면 부자의 재물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부자의 재물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나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재산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관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질식시킨다(마태 13,22 참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 ‘부자와 가난한 나자로의 비유’(루카 16,19~31)를 보면 재물에 탐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것인지가 잘 드러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이, 버림받은 이, 죄인들과 친교를 나누며 어울리신다. 소위 자칭 의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그런 무리들과 함께 먹고 친교를 나누시는 것에 대해 항의할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분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물론 부유한 재산이 그 자체로 악이라거나 가난은 무조건 선하다고 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오류이고 편견이다. 소유한 돈을 올바로 이용하지 않거나, 불의하고 헛된 일에 사용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
한 인간이 소유한 돈과 정신적 재능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과 이웃, 사회를 위해 요긴하고 유익하게 사용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재화가 모든 이의 공동 권리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개인의 돈이라도 만인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곧 재물은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고 사회의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노동하는 인간 14항 참조). 재화는 자기의 인격완성을 위해 활용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적절히 사용되어야 한다(어머니와 교사 119).
가난과 물질에 관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일생은 외형적으로는 보잘 것 없고 가난했지만, 어떤 부자 못지 않게 정신적 풍요와 만족을 누리셨다.
그분은 일정한 금전과 재화를 직접적으로 소유하지 않으셨지만, 부족한 것도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도 없이 당신 생애와 활동을 부요하게 장식하셨다. 그 분은 인류구원을 위해 삶을 마치면서도 평온과 휴식의 자리를 얻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긴 상처뿐인 육체를 겨우 눕히고 군중 앞에 높이 매달릴 십자가라는 형틀만을 소유하셨다.
그분은 아무것도 없으셨기에 온 세상을 소유한 풍요함을 누리셨다. 그래서 그분의 궁핍은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충만한 성사(聖事)로 자리매김되었다.
◎주수욱 신부·서울 독산1동본당 주임
사목자의 가난은 굳센 믿음의 표시
서울대교구 신부인 나는 과연 가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조건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가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성직자라면 가난의 의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절대적 조건을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왜 가난을 강조하셨을까? 이 시대에 아직도 유효한 말씀인가?
지난 겨울 대통령 선거와 이번 봄 총선에서 국민들이 열망하는 것을 보면 가난과는 한참 멀다.
원래 양떼를 지키는 사목자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오늘 성직자인 사목자가 활동한다. 그러니까 양떼인 신자들, 아닌 모든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불철주야로 뛰고 계신다. 이것을 신부인 내가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의 표시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오늘날의 특징은 빈부의 차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 시대에 뜻밖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방 어디를 가도 넘쳐나는데,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 교회는 어디에 몸을 둘 것인가?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19세기와 20세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실하지 못해서 엉터리 사상인 공산주의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말았다.
이제 또 반복할 것인가? 이 새로운 세계 경제 구조 안에서 교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전통이다. 그러자면 성직자의 가난이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사이비 성직자에 대해서 사회는 얼마나 매섭게 질타하는가? 최근 매스컴의 반응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성직자도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 일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가난은 사목을 효과적으로 하는 수단이다. 가난하신 예수께서 가장 효과적으로 일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10,10). 교구 신부의 가난은 자신을 위한 구도의 가난이 아니다. 신자들과 비신자들의 가장 효과적인 복음화와 사목을 위해서 가난은 필수적이다.
성직자의 가난을 위한 스승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천당같은 조건으로 사는 바로 내 옆에서 그들은 지옥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운명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그러나 특히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내 눈 앞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로부터 나는 가난을 사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가난을 향해서 매일 회심을 하도록 촉구를 받고 있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그렇다고 가난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라는 스승님의 말씀에 귀를 닫을 수 없다.
이 가난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은총의 힘으로 가난해지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십자가 죽음에서 아드님을 부활시킨 아버지의 능력을 증거해야 하겠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김태건 신부·성안드레아 피정의집 원장
가난은 수도자의 삶 풍요롭게 이끌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만큼 맥 빠지는 것은 없다. 수도자의 가난은 당연하기 때문에 이렇게 지면에 글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게 느껴질 정도다.
수도자들은 3대 서원을 한다. 청빈 정결 순명이 그것이다. 사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외면하고, 스스로도 가난하지 않은 수도자는 수도 생활의 본질을 잊은 것이다. 수도생활 자체가 가난의 한 가운데 놓이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수도자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모든 수도자들은 물질적, 정신적 가난을 넘어선 영적인 가난을 제대로 몸으로 체득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늘 경계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다.
영적으로 겸손하고 영적으로 배고플 때 진정한 수도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가난(여기서 나는 이 가난을 물질적, 정신적, 영적 가난의 총체적 입장에서 생각한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수도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냉혹하고 차디찬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진정한 가난의 의미를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 가난이 중요하다’ ‘영적 가난이 중요하다’는 말은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아가는 수도자가 자신을 합리화 하는데 사용하라고 있는 말이 아니다. 물질적 가난의 중요성 또한 영적 가난, 정신적 가난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가난은 거창한 구호나 그 어떤 대단한 내세움이 아니다. 그저 소박한 삶 그 자체다. 가난은 저 앞에 놓여있는 성취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가난은 수도자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어떤 한 남자가 고기를 허리춤에 달고 산길을 걷고 있었다. 고기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고기를 노리고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남자는 도망쳤지만 소용이 없다. 동물들은 끝까지 그를 따라왔다. 남자는 동물들에 할퀴고 물어 뜯기는 등 큰 상처를 입었다. 탈진 상태다. 남자는 그제서야 고기를 던져버렸다. 그러자 짐승들은 고기 주위로 몰려갔고, 남자는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기사입력일 : 2008-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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