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예수라도 괜찮습니까?”
종교적 주제를 통해 근대사회 본질적인 병폐 고발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 그림 상단에 조그맣게 묘사
몇 해 전 약간 어딘가 아픈 곳이 생겨 어느 대형 종합병원에 간 적이 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주차장을 몇 바퀴 빙빙 돌고 있는데 마침 차 하나가 빠져 나가는 것이 보여 얼른 그 자리로 가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차를 세웠다.
예약 시간에 늦어서 마음이 바빠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차 문을 여는데 평소보다 문이 크게 열려지면서 옆의 차에 부딪쳤다. 어! 하는 순간, 옆 차의 운전석 창유리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년의 남자가, “어이, 아반테 지금 뭐하고 있는 거요.” 이 말에 깜짝 놀라 옆 차를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벤츠 자동차가 위협적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분은 차 가격이 ‘일억 오천’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나의 무신경과 부주의를 심하게 나무랐다. 그 차가 어느 정도 긁혔는지 살펴볼 여유도 없이 머릿속에서는 보상비 계산이 먼저 돌아갔다. 일단 용서받는 것이 최선책이라 판단되어 허리를 굽히며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다. 그 분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하면서 앞으로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가보라고 말했을 때 너무 기뻐 병원 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미 병이 다 나은 것 같이 가벼웠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그 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사실 차가 조금만 살짝 긁혀도 보상비를 요구하며 생떼를 쓰는 것이 보통 상식선이 아닌가. 요즈음 신문, TV 뉴스를 장식하는 기득권층들의 물질에 대한 탐욕의 추잡함에 비추어보면 내가 만난 그 분은 과시욕은 있었지만 탐욕에 가득 찬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산업과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물질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고, 또 물질에 대한 수준 차이는 천차만별이라 위를 보아도 끝이 없고, 아래를 보아도 끝이 없으니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치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물질에 대한 무력감과 상실감을 겪어 보았을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기도 내용 중 물질적 풍요, 승진, 권력, 사회적 지위 상승 등을 위한 것이 80% 이상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기도에는 전혀 관심 없이 ‘가난한 자는 복을 받느니’ 라는 말씀만 거듭 하신다면, 오늘 당장 그 분이 부활하셔서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거실 안으로 들어오신다 해도 반갑지 않을 것 같다.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 1949)는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1888)에서 현대인을 성경의 내용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시민들이 들떠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하며 그를 환영하였는데, 앙소르의 작품에서는 예수가 나귀를 타고 브뤼셀에 들어오시는데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춘 채 단 한 명도 예수를 쳐다보지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환영받지 못하는 예수는 성경에서처럼 당나귀를 타고 후광을 크게 두르고 있지만 당당한 구세주라기보다 귀가하는 초라한 패전병 같이 보인다. 사실 예수는 그림의 상단에 조그맣게 묘사되어 관람자조차 그분의 존재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앙소르는 종교적 주제를 통해 근대 사회가 갖는 본질적인 병폐를 고발한다. 산업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뿐 아니라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와 종교적인 믿음, 신앙심을 퇴색시켰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초라한 당나귀를 타고 손에 아무 것도 쥔 것 없이 들어오는 가난한 예수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난하고 초라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조금도 반갑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시민들은 예수가 축복을 주기 위해 브뤼셀에 오셨는데 ‘예수 환영’이라는 글 대신에 ‘사회주의 만세 VIVE LA SOCIALE’라는 환영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그들은 빈부격차, 부르주아들의 도덕 불감증,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도입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종교에 철저한 냉소를 던지고 있다.
사회주의가 진정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적인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까. 인간 세상의 구조상 만인이 물질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은 지위고하, 부의 정도를 떠나 모두가 존중받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대접받는 사회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마구간에 태어나 스스로 가난했으며, 모욕과 멸시 속에서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수난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낮은 자세로 더 낮은 자를 섬길 것을 당부하셨다.
앙소르가 주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아서 비극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계심에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극이라는 것이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 영혼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 비극이다.
김현화(베로니카) 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벨기에 출신 화가이자 판화가. 근대 회화의 귀재로 일컬어지는 제임스 앙소르는 흔히 뭉크, 호도라와 함께 표현주의 선구자로 꼽힌다. 벨기에 지폐에서도 만나볼 수 있을 만큼 널리 사랑받고 있는 국민화가인 반면, 살아 생전에는 말년이 되기 전까지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삶을 산 인물이다.
그의 우수한 예술가적 자질은 20세 즈음 젊은 시절부터 인정받았지만, 풍자적이고 비관주의적 세계관이 담긴 작품으로 인해 끊임없이 사회를 들썩이게했다.
특히 그는 해골과 유령, 무시무시한 가면 등 기괴한 환상의 이미지들을 통해 인간의 허위와 도덕성 문제를 환기시키고자 애쓴 작가다. 이번 호에서 감상한 현대적 종교화의 대표작인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도 더럽고 번쩍이는 색채의 축제 가면들로 가득찬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아졌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사회적 논쟁 또한 불거졌다.
그는 ‘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전에 표현주의적 작품을 그린 선구적인 화가였으며, 무엇보다 어두운 도상들을 활용해 삶의 공포를 철학적으로 드러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또 비구상에 가까운 ‘성 앙투안의 고난’ 등에서는 눈부신 색채기법도 선보여 눈길을 끈다.
앙소르가 추구한 표현주의라는 것은 쉽게 반자연주의적 경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더 이상 자연을 모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주관적인 표현을 추구,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을 통한 예술적 변형을 드러낸다. 또한 우리 내부 세계에 있는 가장 모순적인 것 등을 발굴해내는 과정의 하나로도 설명되는 일종의 ‘감정표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림설명 : 제임스 앙소르,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8, 252.5×430.5cm, 폴 게티 미술관, 로스엔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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