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고자질(?)은 아담이 했다고 창세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아담에게 하느님께서 어찌 따 먹었느냐고 추궁하시자, 아담은 사내답지 못하게 하와를 고자질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둘이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한 몸을 이루었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제 탓이오’가 아닌 ‘남의 탓’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은 끊임없는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극도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같은 삶의 끝은 육과 영이 함께 죽는 죽음의 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끊임없는 몸부림 속에 깨닫는 것은, 결국 수렁의 깊고 깊은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가련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은 깊은 수렁 속에서 비로소 한 줄기 빛을 만나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이셨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몸부림 쳐도 하느님과 갈라졌던 분열을 다시 이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성령과의 일치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삶이셨습니다.
천사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으신 성모님께서 믿지 못하시자,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 35).
예수님의 탄생, 세례, 광야의 생활, 갈릴래아 전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그분의 전 생애에는 늘 성령께서 함께 하셨던 삶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갈라졌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예수님 안의 성령께서 하나로 일치시켜 주셨기에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 6)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 13).
모든 사회적 계급과 인종과 사상이 벽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놀라운 힘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분열의 역사에 또다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청해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되는 삶이 생명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인간의 허망한 노력으로 하나임을 꿈꾸었던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특별히 인류의 피비린내 나는 정복의 역사에서 대제국이 완력으로 일치를 이루고자 했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제국들이 시도했던 언어의 통일도 끝내는 치욕의 역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벨탑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제자들의 말은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전쟁과 폭력 없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하느님 위업의 찬양을 자기들의 언어로 듣고 있다고, 통일된 언어로 들었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사도 2, 1~11).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그토록 꿈꾸었던 지상낙원이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 어떠한 인간적 노력으로도 불가능 하였던 일치와 나눔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게 된 초대교회 신자들은 진정 잃어버린 옛 낙원을 지상에서 되찾았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 44~45)
그렇기 때문에 인간 창조의 첫 순간,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성령)을 불어넣으셨던 것과 같이(창세 2, 7)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시어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불과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타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자들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던 죽음의 두려움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거침없는 희망 속에 복음을 살았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오늘의 세상을 성령의 인도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진정 생기가 사라지고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는 오늘의 신앙에 뜨거운 불의 성령께서 다시금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