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배낭 가득 사랑을 싣고~”
# 동네 심부름꾼 권주사
“내일 올 때 설탕 한 봉지하고 기름 한 병 사다줄런가.”
“네, 그러지요. 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으세요?”
“아, 참. 이 나물도 좀 부쳐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한 모자간으로 착각할 만하다. 심부름을 부탁하는 할머니와 집배원 권승태(시몬·57·원주교구 정선본당)씨 사이에 오가는 강원도 사투리 섞인 대화에서는 정겨움이 뚝뚝 묻어난다.
비를 뚫고 1시간여 만에 도착한 또 다른 집. 처마 밑에서 권씨를 맞은 집주인이 고생한다며 담배를 권한다.
“비가 쉬 그칠 것 같지 않은데, 고생이구먼.” “늘상 하는 일인데요, 뭘.”
가까운 친척간인 양 이러저런 안부를 나누던 권씨가 다시 오토바이 머리를 돌린다. “비도 오는데 조심허고….” 염려를 뒤로 하고 길을 나선 권씨, 이번에는 오토바이도 들어가기 힘든 비탈길이 나타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 미끄러워 웬만하면 걸어가는 게 낫다. 권씨를 반갑게 맞은 할머니가 이번에는 통장과 도장까지 쥐어준다.
“세금 내야하는데…. 은행에다 요것 좀 내줘. 돈도 좀 찾아다 주고.”
“예, 그러지요. 근데 할머니,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세요?”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다시 할머니댁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지병이 도져 병원이 있는 도회지 딸네로 옮겨야했다. 1978년부터 꼬박 31년째 주민들 사이를 오가며 우편물을 전하다 보니 이제 어느 집 숟가락 개수는 물론 얼굴색만 봐도 기분까지 알 정도가 돼버렸다.
“어이 권주사!”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권씨를 발견한 마을 노인이 또 멀찍이서 손짓하며 부른다.
“예~에, 저 집만 들렀다가 곧 갈게요~오.”
자잘한 부식거리 사다 나르는 일에서부터 은행 업무에 약 심부름까지 안 하는 심부름이 없는 권씨는 자기 일만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냥 우편물만 전하고 가는 법이 없다.
“홀로 사시는 분들이라 잠깐 말벗이 돼드리는 건데, 그렇게 좋아하시니…. 편지와 조그만 제 마음을 함께 전하는 것 같거든요.”
굽이굽이 산길을 돌며 각종 우편물에 심부름거리까지 전하느라 그의 이마엔 늘 땀방울이 그득하지만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 화전 일구던 마을이래요
권씨의 일터이자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 정선군 동면은 평균 해발만 500미터가 넘는 곳. 하루 동안 돌아야 할 데만 여의도의 열다섯 배가 넘는 넓이의 산골짝에 널린 13개 마을, 꼬박 200리 길이다. 왕복 100km가 넘는 길을 쉬지 않고 다녀야 할 때도 적지 않다. 주유소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돌아올 기름을 담은 통까지 싣고 다녀야 했을 정도니…. 사람이 살 것 같지도 않은 외진 골에 들어앉은 집까지 찾아다니다 보면 해가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보낼 때도 적잖다.
점심때를 훨씬 넘긴 시간. 정신없이 산길을 헤치며 다니던 권씨가 비가 덜 들이치는 나무 밑에 자리를 잡는다. 산골이라 식당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어 배꼽시계가 밥때를 알리면 산길 아무데서나 준비해 간 빵과 우유로 점심을 때운다.
“그래도 지금은 세상 좋아졌지요, 자전거 타고 다닐 때 생각하면.”
권씨가 태어나 자라고 지금껏 살고 있는 동면은 화전을 일구며 살던, 그야말로 두메산골이었다. 그의 말대로 ‘강중배기’(곤두박질)하면 큰일 날 ‘뼝때’(바위절벽)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산길에선 잠시라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15년 전쯤 집배원들에게 오토바이가 보급되면서 5명이던 집배원 수는 3명으로 줄고 다녀야 할 곳은 더 늘어났다. 눈이나 비가 많이 와 며칠씩 길이 끊길 때면 권씨 자신이 더 조바심친다. “다들 무탈 하신지….”
# 주님의 심부름꾼 권회장
집배원 권씨는 정선본당 관할 동면공소에서는 회장님으로 통한다. 보통사람 몇 갑절 몫을 해온데다 몇 년 전에는 공소회장을 맡아 주님의 심부름꾼 역할까지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태어나 한 곳에서 살아오고 있는 덕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를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터라 공소 회장으로선 적격이었던 셈이다.
“아들내미는 성당 잘 다닌대요?” 도회지에 나간 신자 자녀들의 신앙까지 살핀다.
젊은이들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오지에서 그의 몫은 공소를 뛰어넘는다. 우편물은 종교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개신교 교회와 절들을 들락거리며 그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한다. 명절 때면 경로당에 들러 노인들에게 먹을거리를 대접하는가 하면 따로 우편물이 없어도 수시로 홀로 사는 노인들 집에 들러 안부를 묻기도 한다. 여든을 넘긴 할머니와는 결연을 맺어 수시로 찾아가 건강을 돌보는 일도 권회장의 몫이다. 인적 드문 산골의 약수를 길어다 이웃의 건강을 챙기는 세심함도 천상 타고난 신자일 수밖에 없다.
“조그만 심부름인데요. 다들 가족이나 친척이나 다름없어요.”
젊은이들이 떠난 오지에서 권회장은 자신의 조그만 몫에 열심한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일임을 몸으로 깨달은 모양이다.
이런 그의 마음씀씀이 때문일까, 특별히 권하지 않아도 신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이도 적지 않아 지금껏 수십 명을 주님께로 이끌기도 했다.
“허, 제가 뭐 특별히 한 게 있나요. 그저 이끄시는 대로 살뿐이지요.”
오늘도 험한 산길을 헤치며 우편배낭에서 사랑을 꺼내줄 권씨의 얼굴에 묵묵히 주님을 따르던 시몬 베드로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사진설명
권승태씨는 31년째 굽이굽이 산을 넘어 마을사람들에게 우편물을 전하고 있다. 때로는 말벗이 되어주고, 때로는 심부름도 마다않는 그는 모두가 가족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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