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배려하는 삶은 사람을 살리는 삶이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는 그 유명한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가리키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예이다.
청년시절 관중과 포숙아는 의기투합하여 동업자로서 생선가게를 크게 운영하였다. 물건을 구입하고 금전을 계산하고 나누는 일은 지혜로운 관중이 맡고, 허드렛일과 노동이 따르는 일은 포숙아가 도맡아 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영업이 끝나고 이익금을 나눌 때면 언제나 포숙아보다 관중이 가져가는 몫이 더 많았다. 그래서 점원들이 포숙아에게 말하였다.
“동업자로서 이익금을 똑같이 나누어 가져야 하시는데 왜 관중만이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지요?”
이에 포숙아는 “여보게, 관중에게는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다네. 그러니 관중이 나보다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이네”라고 답했다. 이토록 포숙아의 삶은 언제나 관중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관중은 말년에 “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아다”라며 포숙아에 대한 깊은 우정과 감사를 표현했다.
두 번째 예는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들이다. 예전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들은 가족들의 밥그릇에는 밥을 그득히 담았지만 정작 자신의 밥그릇에는 기껏 누룽지를 담거나 그나마도 담지 않으셨다. 또한 언제부터 입으셨는지 조차 모를 낡은 옷을 깁고 또 기워 누더기와도 같은 옷을 입었지만 자식들에게는 새 옷을 입혀 주려 하셨다. 왜 어머니라고 따스한 밥을 먹고 새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셨기 때문이다.
포숙아의 관중을 위한 희생과 배려의 삶이 없었다면 관포지교란 유명한 우정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면 가족 공동체가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도 당신께서 창조하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전적으로 배려하시어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제라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머니께서 그랬듯이 아무 조건 없이 온전히 이웃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배려와 희생과 사랑의 실천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늘 노력하여 습관이 되도록 훈련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삼위일체의 완전한 일치는 공동체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고 있다. 이로써 상대방을 살리는 삶이 체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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