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성모? 꼭 그렇지만은 않아”
매맞는 아기예수는 타성에 빠진 회화에 들이대는 매
초현실주의적 은유로 권위 비틀며 가치관 전환 촉구
한가로울 때 무엇을 하는지 가끔씩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가한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바쁘게 살다보니 여유롭게 무엇인가를 즐기는 시간은 거의 없는 것 같고 그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따스한 행복을 느끼는 정도이다.
그 외에 식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시간 투자가 쉽지가 않고, 영화를 한 때 좋아하기도 했지만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묵인되는 폭력성에 질렸고, TV 드라마도 그저 그런 정도다. 솔직히 고백하면 만화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명탐정 코난’도 자주 보는 편이고 특히 ‘짱구는 못 말려’는 신문의 프로그램 안내에서 방영 시간대를 찾아볼 만큼 열심히 보고 있다.
말썽꾸러기 짱구는 유치원생이라고 하기에는 영악하기 짝이 없고, 짱구의 부모는 어수선하고 실수투성이의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성실하고 정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짱구 엄마의 아이들 교육도 얼핏 보면 무절제하고 산만하게 느껴지지만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일정한 원칙이 있다. 겨우 다섯 살인 짱구이지만 장난감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 준비를 하는 엄마를 도와 식탁을 닦고 상을 차리기도 하고 빨래 너는 일을 돕기도 한다. 심지어 짱구 엄마는 친구들과 놀기 위해 몰래 빠져 나가는 짱구를 붙잡아 이불을 베란다에 널게 하기도 하고, 마당의 잡초를 뽑지 않으면 간식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짱구 엄마는 아들을 친구처럼 친밀하게 대하지만 짱구의 장난이 도를 넘으면 엉덩이를 때리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는 1926년에 ‘아기예수의 엉덩이를 때리는 성모’의 모습을 회화로 보여주었다. 성모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아름다운 여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무너트리고 인정사정없이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고 있는 무지하고 상스러워 보이는 여인을 성모라고 소개하고 있다.
얼마나 매질이 독한지 아기예수의 후광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상상으로는 아기예수가 평범한 아이들과 분명 다르게 의젓하고 어른스러웠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말썽을 부리고 장난을 쳤기에 이렇게 맞고 있는 것일까. 아기예수가 성모에게 맞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는 목격자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이끈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문학가인 폴 엘뤼아르, 그리고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아마 에른스트 자신일 것이다.
에른스트는 독일 퀼른에서 활동하다 1922년에 파리에 도착한 후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현실주의자란 문학과 미술에서 이성과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꿈, 무의식, 잠재의식 등을 탐구하는 예술운동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이론가, 문학가, 미술가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증언한 성서 속의 동방박사들처럼 아기예수가 성모에게 맞았다는 것을 증언하며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다.
에른스트는 왜 아기 예수가 엉덩이를 맞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을 그렸을까. 혹시 성모와 예수를 야유하고 모욕하기 위해 무례하고 불경스러운 그림을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성모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로 성장시키기 위해 엄격하게 교육시켰을 것 같기도 하다.
에른스트가 이 그림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성경의 이야기 혹은 성모와 아기예수의 초상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위의 성자인 아기예수가 엉덩이를 맞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아카데믹한 규범 속에서 타성에 빠진 회화에 매를 들이대는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을 은유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내리치는 매가 전통적인 회화에 씌워졌던 후광을 땅바닥에 떨어트린 것이다.
전통적이라는 것이 결코 낡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초현실주의가 유행한 1920~30년대에 유럽인들은 원자핵 분열, X-ray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성과 논리, 실증과 실험으로만 증명될 수 없는 우연과 불확실성의 신비적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전통적인 회화는 더 이상 이 시대의 미적 가치를 대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에른스트의 그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현실주의적 은유로서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모와 아기예수의 위엄과 권위를 비틀면서 구세대의 낡은 가치관과 개념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김현화(베로니카, 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 막스 에른스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독일의 중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에른스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정신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철학을 배운 바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에른스트를 ‘철학파 화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젊은 시절의 학업은 그가 철학적으로 깊이있는 그림을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미술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던 에른스트는 우연한 경험에 의해 화가의 삶에 빠져들었다. 어느날 정신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에 실습강의를 간 에른스트. 환자들의 회화와 조각 등의 작품을 본 그는 ‘정신병 환자들이 그린 그림이야말로 천재적이다’라고 생각했다. 큰 감동과 충격을 받은 에른스트는 스스로도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미술을 독학하기에 이른다.
화가로서의 여정 중에서는 우선 초현실주의 그룹의 시인 브르통, 엘뤼아르, 아라공 등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초현실주의 미술을 이룩하려고 한 노력이 돋보인다.
에른스트가 시도한 대표적인 작품 형태는 자신의 내적 불안과 공포의 미학을 전문적인 학술잡지나 백과사전 등에서 발췌한 조각들로 세밀하게 콜라쥐한 것 등이다. 특히 그의 그림 속의 이미지들은 사물 그 자체와는 이미 다른 어떤 것의 형식를 취한다.
즉 에른스트는 내적 실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현실에서 차용된 사물들을 이용, 자신의 심상을 표상하는 은유적인, 언어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 아울러 에른스트는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를 통틀어 애매모호한 제목을 통해 작품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림설명
에른스트, 「세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성모 마리아 :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예술가(The blessed Virgin Chastistes the Infant Jesus Before Three witnesses: A.B(Andre Breton, P.E(Paul Eluard) and the Artistes)」, 캔버스에 유채, 루드비히Ludwig 박물관, 쾰른Koln(Cologne), 1926, 196 x 130cm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