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이 숨죽여 걷던 그 길을 우리도 함께…”
“판암동은 다 왔어요? 본당 신자들 다 모였나 봐요. 엄청 많이 오셨네. 어서 식권 받으세요. 맛있는 김밥과 떡이 기다립니다.”
“바오로 할아버지가 아직도 안 오시네. 날도 더운데 끝까지 걸으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더니… 아이고. 저기 오시네.”
6월 15일 오후. 지방리공소(대전교구 금산본당, 충남 금산군 진산면)가 들썩인다.
신자 50명이 채 안 되는 공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처음.
산길 10여km를 두 시간 가까이 꼬박 걸은 탓에 온 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다.
신앙선조들이 참나무를 베어 지게를 지고, 옹기를 부여안고 박해를 피해 숨죽이며 걸었던 그 길을 오늘 걸었다.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은 대전교구가 칼바람 불던 2월 시작한 도보성지순례가 이날 여덟 차례 순례 대장정을 마쳤다.
그들을 기억하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자. 그렇다면 먼저 순교자들의 자취를 찾아 나서자.’
도보성지순례는 이렇게 시작됐다. 교구 신자들에게 성지와 성지 곳곳에 오롯이 배인 순교자들의 숨결은 크나 큰 자랑이다. 게다가 올해는 교구 설정 6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
그분들이 걸었던 이름 모를 샛길과 강길, 바닷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2월 23일 천안 태조산 수련원에서 성거산성지 간 6.1km 순례를 시작으로 모두 여덟 차례 도보성지순례가 열렸다. 순례자들의 발길이 머문 성지는 솔뫼?신리?여사울?다락골?갈매못?홍주?해미?공주 황새바위?지방리 등 10여 곳. 공세리와 합덕, 화마루공소 등 유서 깊은 성당도 순례자들을 반겼다.
4개월 136km의 여정에는 연인원 1만 3천 여 명이 참여했고, 여덟 차례 성지순례에 빠짐없이 참가한 순례자도 교구장 유흥식 주교를 비롯해 60여명에 달한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이르듯 삽교천을 건너 솔뫼에 닿다’
올해 칠순인 정구선(요셉?유성본당)씨도 그 중 한명. “이렇게 걸으며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성지가 많은 대전교구가 자랑스럽다”는 그는 도보성지순례를 탈출기에 빗대 이야기했다.
“공세리성당을 이집트로 삽교천을 홍해로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솔뫼성지, 즉 가나안 땅으로 가는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겠죠. 걷는 것이 곧 성경공부였어요.”
대전 유성 어린이집 아가타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도 “여덟 차례 성지순례에 모두 참가하는 게 올해 목표였는데 오늘 마칠 수 있어 뿌듯하다”며 “길을 걸으며 이름 없이 신앙을 증거 하다 목숨을 바치신 무명 순교자들에 대해 묵상했다”고 전했다.
성지순례, 새 길을 만들다
여덟 번의 성지순례는 몸으로 체험하는 순례문화를 선보였다는 데 의미를 갖는다.
차에 몸을 싣고 성지에 들러 밥 먹고 미사 보는 ‘반짝’ 여행이 아니라 순교자들을 따라 걸으며 그들의 정신을 체험하는 진정한 순례를 교구민들이 경험했다는 것은 60주년을 맞은 교구가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용호 신부(교구 설정 60주년 준비위원회 사무국장)는 “물질적인 명예를 포기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산길을 택한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편리함을 잠시 버리고 걸으며 신앙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 큰 수확”이라고 밝혔다.
길에서 길을 찾다
대전교구 60주년 기념 로고에는 쉼표 모양의 ‘6’자와 마침표 형태의 ‘0’이 자리하고 있다. 쉼표는 잠시 멈추고 과거를 되돌아 기억한다는 의미를, 마침표 모양의 ‘0’은 최종 목적지로 향하는 교구 공동체의 완성될 미래를 뜻한다.
여덟 차례의 도보성지순례는 과거 순교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천천히 걷는 쉼을 이야기한다. 이제 길 속에서 길을 찾았다. 교구 60주년 순례 여정은 쉼표를 딛고 다시 시작됐다.
◎여덟차례 도보순례 모두 참가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신앙은 곧 체험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역사 속 예수님을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보여 달라고 한 간디의 말처럼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순례에 참가한 신자들과 무사히 순례를 마칠 수 있도록 은총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는 그늘에서 쉬고 있는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수고했다’는 덕담을 건네기 바빴다.
“전 주교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때만 주교이고 다른 때는 똑같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신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산을 넘고 이야기나누며 땀 흘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건 은총이죠.”
함께 발걸음을 내디뎠던 신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순례 전후 우리 육체는 많이 바뀌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변화된 것은 순교자들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마음가짐입니다. 걷는 것이 불편하지만 내 옆에 동료가 있고 선배 순교자들이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영혼을 더욱 살찌웠습니다.”
유주교는 특히 순례를 마치고 미사를 봉헌하며 전대사의 은총을 받은 신자들이 말할 수 없이 기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덧붙였다.
“순교자들이 지니셨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복음을 빛으로 모시고자 했던 삶을 본받으려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누룩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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