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 좌석버스를 탄 내 곁에 한 아가씨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앉았다. 일에 찌들어 보이는 모습이 참 안스럽다 생각했는데, 한 두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어디서 걸려온 전화. 전화기를 꺼내드는 순간부터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응, 자기…. 나 퇴근하고 가는 중인데… 그래…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있다 봐요….” 생기 있는 목소리에 밝은 표정, 부드러운 미소까지 곁에 앉아있던 나까지도 활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였던 거겠지?
“신부님은 제 이름 아십니꺼? 모르시지예? 기억하시겠나….”
성당 마당에서 한번씩 할머님들이 깜짝 놀라게 할 때가 더러 있다. 정말이지 소화, ‘작은 꽃’이라는 공동체의 이름대로 참 정겹고 귀한 교우들과 만난 지 5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렇게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아는가? 하고 물어오면 답하지 못할 때가 아직도 있다. 교우들의 이름을 잘 외우는 게 본당 사목의 좋은 방법이라고 하는데 사실 어느 단체에 속해있거나 활동을 좀 하는 경우에는 쉽지만 주일에만 만나는 교우들은 이름을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 물론, 그럴 땐 이름보다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모르긴 왜 몰라요? 애들은 잘 있지요?”
이러다 틀리면 더 큰 낭패. 솔직하게 다시 묻는 것도 좋겠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잊어버릴 수 없게 하는 분들도 있는데 거의 매달 치약을 하나씩 가져다주시는 안나 할머니, 근육질에 우락부락 해보이지만 산나물을 직접 구해와 맛있게 요리해 주시는 레오 형제님, 가끔 마당에서 느닷없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어디 딴 데 갈 생각하지 말고 오래 오래 있으라며 1000원 짜리 지폐를 손에 꼭 쥐어주시는 발비나 할머니, 맛있는 간식에 감동적인 쪽지를 꼭 끼워 검은 봉지를 사제관 문에다 걸어 두시는 테레사 자매님, 수 없이 많은 이름들에는 고구마나, 찹쌀, 혹은 작은 일들이 그만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사랑의 표현들과 함께 기억될 때가 많다.
이탈리아 말에 ‘전화’를 하거나 누구를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 말은 ‘CHIAMARE’라는 같은 동사로 사용한다. ‘누구’라는 뜻의 CHI와 ‘사랑한다’는 동사인 AMARE를 붙여 쓰는데, 우리가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나누는 일이 얼마나 큰 사랑의 표현이 되는지를 말해준다. 더 친밀하게 서로의 귀한 이름을 부르게 되기를 바라며 시인 김춘수님의 ‘꽃’을 나누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성구 신부 (대구 소화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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