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고 보잘 것 없는 이에게 사랑을”
2년 전, 기자가 취재차 서울구치소를 찾았을 때 봉사자 중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김기섭(요셉) 전 안기부 차장.
인터뷰를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봉사를 할 뿐이었다. 그 해 사형반대의 날 미사에서도, 또 다음해에도 서울 교정사목위원회(위원장 이영우 신부)의 행사에는 언제나 그가 서 있었다.
그러던 김기섭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출소자와 살해피해자 가족을 위한 기쁨과 희망은행 창립식이 열린 직후다. 6월 27일. 그의 자택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주님 일꾼입니다. 내 이름이 결코 높아져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천주교를 알다
김기섭씨에게는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회장이라는 이름보다 전 안기부 차장이라는 이름이 먼저 붙는다.
사람들은 안기부 자금사건에 연루돼 수감된 후 2004년 무죄판결을 받은 그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난 11년간 받은 검찰조사가 5번, 재판은 70번, 수감생활은 3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의 시간에서 하느님은 절 만나주셨고 기적과 같은 체험을 주셨습니다.”
그가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감옥에서다. 아내가 신자가 된 후 꼭 1년만의 일이었다. 한 신부의 권유에 의해 예비자 교리서를 받은 계기로 그는 교리서는 물론 성경과 신심서적까지 읽고 세례를 받았다.
“하느님은 저를 철저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3번 수감생활 중 성경을 세 번 완독시키시고 신심서적,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 김수환 추기경님의 명상록 등 약 40권을 읽었으니까요.”
그는 권력의 핵심이었던 자신이 한순간 감옥에 갇혔던 기분을 ‘낭떠러지로 떨어진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1.2평 남짓한 방에 갇혀있다는 것. 부족한 것이 없었던 그가 ‘자유의 다리로 북한산에 등산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 됐다.
기쁨과 희망은행
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모두 ‘기쁨과 희망은행’을 알리기 위해서다. 출소자와 살해피해자를 위한 무담보 대출은행을 준비하면서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제게 3번의 기회를 주셨어요. 출소자를 위해서 즉 하느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가 말하는 3번의 기회는 모두 감옥에서 이뤄졌다. 2001년 1월, 교도관으로부터 ‘오늘은 70 가까운 노인이 출소하는 날인데 갈 곳이 없다고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수감 중 미국의 닉슨 대통령 정부 당시 찰스 콜슨 보좌관이 쓴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라는 책을 읽은 것이다. 찰스 콜슨 보좌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범으로 수감돼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 책을 썼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찰스 콜슨은 재단을 만들어 수용자들의 교화와 출소자들의 재활, 범죄피해 가족들을 돕고 있다.
그가 말하는 마지막 계기는 스스로의 체험이다. 2004년 7월 5일. 안기부 자금사건 2심 최종 판결이 있던 날이다.
그는 6월 24일, 최종판결을 기다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성모의 형상을 봤다고 증언한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3일 동안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다들 살짝 돌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옥에 가지 않을 거라고 친구들에게도 자신있게 말했죠. 부인이 많이 울었어요.”
그는 최종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1년간 겪었던 시련과 고통의 순간이 한순간 기쁨으로 변했다.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전과자, 취직하기 힘듭니다. 재범률도 그만큼 높아지고요. 출소했던 사람이 또 범죄를 저질러 저와 다시 만나는 기분, 정말 슬프지요.”
그는 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영우 신부와 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출소자와 살해피해자 가족을 위한 기쁨과 희망은행 창립을 계획했다.
2억을 모금한 후 자신의 재산을 보태고, 교정사목위원회 예산을 출자해 자본금 5억을 만들었다. 또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물론 한때는 같은 시련을 겪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도 고문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그는 이제 전 안기부 차장보다도 기쁨과 희망은행의 후원회장으로 남고 싶다. 현재 그는 수감자들을 위해 매년 2명씩 대부를 서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할 예정이다.
“기쁨과 희망은행이 더욱 발전해서 보다 많은 출소자들에게 창업희망을 줘야 합니다. 갈수록 어려워져가는 사회지만 정신적으로 병든 이들에게 사랑을 줍시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헐벗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옥같은 시간들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침기도를 하며 눈을 뜨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수감자를 위한 기도, 교황·주교·사제·수도자를 위한 기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하다보면 어느새 하루 해가 간다.
‘하느님을 위해서는 나를 팔 수 밖에…’라며 말을 흐리는 김기섭 후원회장의 모습은 지금 기쁨과 희망에 넘쳐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