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십자가형,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박힌 예수는 고통받는 유다인의 자화상
주변에는 나치 만행의 비극적 사건들 표현
아무런 죄없이, 어떤 이유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인류역사에서 죄없이 모함당하고 죽어간 사람이 그리스도 뿐이겠는가. 성경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이며, 현대에도 진행 중인 인간의 이야기다.
무고한 사람을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 인간 본능의 잔인한 폭력성은 지금도 전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다. 이데올로기, 종교,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이 되고 그 적을 음해하고 죽이기 위한 전쟁과 살인, 모함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전쟁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죽어간 사람은 차치하고, 매일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경제적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주변 사람의 편견과 오해, 대학입시나 취직시험, 승진 등의 실패로 날마다 십자가에 책형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십자가 책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십자가 책형은 인간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잔혹성, 무관심, 냉담이 빚어 낸 대립과 갈등을 표면화시킨 인류 역사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사회적 불안 속에서 겪는 개인의 고통과 정신적 갈등은 20세기 회화에서 십자가 책형에 비유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샤갈(Marc Chagall, 1889~1985)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다계 화가로서 나치의 유다인 박해가 절정에 이를 때 자신과 유다인이 겪는 고통을 예수의 십자가 책형에 비유하여 여러 점의 그림을 제작하였다.
그는 초기 회화에서 유년시절 유다인의 풍습과 생활에 대한 추억을 주제로 환상적이고 꿈 속 같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유년 시절의 향수를 담은 그의 회화가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한 1930년대 후반부터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주제로 암울하고 참혹한 비극적 세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흰색 십자가 책형’이다.
‘흰색 십자가 책형’은 화면의 중심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 예수의 주변에는 나치의 만행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이 독립된 도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화면의 오른편 상단에는 나치가 유다 교회를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 파괴를 저지르고 있고, 그 아래에는 대혼란 속에서 유다인의 율법(모세의 五書)인 두루마리 형태의 토라(Torah)가 내팽겨쳐져 있다.
그림 하단의 한 유다인이 토라를 보호하듯 안고 도망가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마치 노아의 홍수를 피해 달아나듯 배를 타고 떠나고 있다. 십자가의 예수는 화면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나치의 횡포를 목격하고 있다. 유다인 랍비들과 장로들의 영혼이 예수의 머리 위에서 바라보면서 이 처참한 상황에 놀라워하고 있다.
‘흰색 십자가 책형’에서 샤갈은 예수를 터번을 두르고 탈리스(tallis, 교회당에서 유다인 남자가 기도할 때 걸치는 어깨걸이)를 걸치고 있는 유다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유다인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유다인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샤갈은 예수를 유다인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고, 또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고통받는 유다인의 자화상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는 유다인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를 ‘현대의 골고다’라고 불렀고, 전쟁이 끝난 후 수용소로 향하는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이라고 명칭 되었다.
‘흰색 십자가 책형’에서 예수는 분노와 오열을 침묵으로 삼키고 있다.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지도 않고 공포로 울부짖고 있지도 않는다. 깊은 슬픔과 연민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듯한 예수의 멜랑콜리한 표정은 비극의 진혼곡처럼 화면에 울러 퍼지고 있다.
예수는 자기에게 주어진 유혹과 조롱, 수난을 침묵으로 인내했고 당신의 자손, 20세기의 유다인들이 공포의 대학살로 죽어가는 순간도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샤갈은 힘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예수에게서 동질성을 느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했던 예수를 유다인이 겪는 민족적인 고통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나자렛 예수, 유다인의 왕’이라는 의미의 글자 INRI가 보이고, 왼편 하단에는 가슴에 팻말을 걸고 있는 유다인이 보인다. 이것은 그 당시 독일에서 나치들이 유다인들에게 ‘Ich bin Jude(나는 유다인이다)’라는 글이 새겨진 팻말을 가슴에 걸고 다니게 한 사건의 비유다.
그들이 가슴에 걸고 있는 팻말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글은 서로 관계를 이루며 유다인의 수난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사방에서 유다인들이 수난당하고 있지만 하늘에서 예수에게 성령의 빛을 보내고 있으며 예수의 발밑에 있는 메노라의 촛대에는 불이 켜져 있고 그 불빛은 후광과 같이 빛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결국 부활이라는 영광을 가져왔듯이 나치 하의 유다인의 고통이 아무리 참혹하다 할지라도 분명 희망이 도래할 것이라는 샤갈의 믿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현화(베로니카) 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샤갈은 전세계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가이면서, 미술사에서는 또한 독특한 위치를 지닌 작가로 평가받는다. 우선 피카소의 표현을 빌자면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많은 예술사조를 스쳐지나갔지만 거기에 고착되진 않은 작가로 관심을 모았다. 그의 작품에서는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양식들이 묻어나는 듯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향을 드러냈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대중들은 샤갈을 떠올리면서 이러한 이미지도 함께 기억한다. 그가 떠올린 환상적인 주제는 화려한 색과 샤갈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더욱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도 샤갈의 작품에서는 현대 미술작품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시각적 은유’가 드러난다는데 동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4년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전시회는 1910~1985년에 이르는 샤갈의 전 생애 작품을 보여주는 자리로, 단일작가로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었다.
샤갈의 수많은 작품 중 특히 성경의 메시지 연작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꼽힌다. 샤갈은 1948년부터 프랑스 니스 인근 생폴 드 방스에 정착, 성경을 통한 내적 성찰이 담긴 이야기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화가인 샤갈에게도 성경은 혼란한 세상에 구원을 제시하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의 열정으로 새 성경말씀 소재 역작들은 ‘프랑스 국립 샤갈 성경 미술관’이 서게 했다. 이 미술관은 샤갈의 성경 관련 작품 8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또 샤갈이 생전에 미술관을 위해 제작한 17점의 대형 성경 작품들과 모자이크도 상설 전시한다.
그림설명 : 사갈, '흰색 십자가 책형', 1938, 캔버스에 유채, 155 x 139.5cm, 시카고, 아트 인스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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