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형태는 ‘지금’ 변형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변화하고 열려있는 존재
외양?정신?영의 초월적 변형이 삶 핵심
삶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존재하는 양식 그것이 바로 나의 삶 자체다. ‘지금 여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신앙인들은 지금 여기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부름에 대한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영성생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 성체조배도 하고, 성지순례도 다녀오고, 묵주기도도 한다. 피정을 다녀오고,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하느님 사랑을 실천한다며 혹은 복을 얻겠다며, 혹은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어려운 이웃에게 선행을 베푼다.
하지만 정작 영성생활의 가장 높은 경지는 매 순간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생활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온전히 닮는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교회사 속에서 성인들의 삶을 되돌아 보고, 그 분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지금 여기서 당신들이 살아야 할 것을 잘 살으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가 환자다. 하느님 현존을 느끼는 순간 나는 나약하고, 나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당신의 완전하시고 건강하신 모습 앞에서 나는 진정으로 병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나의 내면과 외면이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역시 우리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할 때 진정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핵심형태, 교류형태, 외양형태는 정지인가 변화인가? 일순간도 정지돼 본 적이 없다. 어머니 뱃속에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삶의 형태는 일순간도 정지 상태에 있어본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 그 순간에도 그 사람은 변화한다.
변화된다는 것은 고정이 아니라는 의미다. 결국 인간은 늘 변화하고 열려있는 존재다. 폐쇄된것이 아니고 나의 외적인 모습 정신적인 모습 영적인 모습이 계속해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열려있는 것이다.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외적인 모습이 현재는 보기 싫을지 모른다. 한 어린아이는 밥먹을 때 마다 국물을 튀길 수도 있고, 콧물을 줄줄 흘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적인 모습은 성장하면서 변화하게 된다. 정신도 변화된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토대를 만들어 놓으셨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에 다음날 48시간까지 열어 주신다. 그것도 모자랄 수 있어 한해 365일 모두 열어주고 계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폐쇄 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좌지우지 하지 않고 우리를 늘 당신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 전체에 완전한 자유로 개방시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껏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외적인 모습도 변화되고 정신도 변화되고 마음도 변화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형성하는 신비께서 하시는 일이다.
열려있다는 것.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어 나아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실제적 삶의 형태(actual life form)들에는 외양형태(apparent form), 교류형태(current form), 핵심형태(core form)가 있다고 수차례 말한바 있다. 이 3가지의 모습을 변형, 정확히 말해 초월적 변형시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삶에 핵심적인 문제다.
나의 외적인 모습을 바꾸고 나의 정신적인 모습을 바꾸고 나의 마음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며 핵심이다. 이것을 못하기 때문에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채 살아가고,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늘 허전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로 상처를 준다.
톨스토이, 버틀런트 럿셀 등 많은 이들이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행복론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모두 이 구도 안에 들어있다. 인간은 일순간에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또한 지상에선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복잡한 3중 구조 속에서 자신의 삶의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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