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에게는 비난 보다 관심이 절실”
알코올 중독자는 자신의 중독 사실을 부인
신체 심리 치료 뿐만 아니라 영적 치료 필요
중독치료과정 참가자 호응도, 회복률 높아
한 잔 술에는 인생을 가득 채워 마신다지만, 한 번 인생에 술이 가득 찬다면 그야말로 약도 없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7월 17일. 술에 빠져 중독까지 이르렀던 사제, 현재는 중독에서 벗어나 서울대교구 단중독사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허근 신부를 만났다.
▧ 한 잔
“가톨릭신문사가 회식을 한다고 칩시다. 각자 소주 한 병 정도를 마실 때까지는 미래지향적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 병이 넘어서면 대화내용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이 슬슬 나오는 거죠.”
술이 술을 마실 때, 사건은 터진다. 안주는 이내 노가리가 아니라 ‘사람’이 된다. 허신부가 지적하는 술의 무서운 얼굴이다.
그가 ‘술’에 대해 해박한 이유도, 중독자들을 사목할 수 있는 이유도 스스로 알코올 중독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982년, 군대에서 배우기 시작한 술은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생각하고 기능하지 못하는 인간을 ‘죽은 인간’이라 하는 것처럼 나는 ‘죽은 신부’였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술을 따라다녔으니까.”
1994년 본당에 부임해서 그는 급기야 ‘해장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주 8병을 마시던 그가 3잔에 취했다. 알코올 중독 말기 증상이다.
잠을 자다 일어나면 시커먼 것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심리적으로 견뎌낼 수 없는 우울과 두려움이 그를 압박했다. 술을 끊게 해달라고 성모상을 붙잡고 몸부림을 쳤다.
▧ 두 잔
그는 근본적으로 알코올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된 사실을 부정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술을 권한다’ ‘술을 먹어도 집에는 찾아간다’ ‘앞으로는 마시지 않겠다’라는 핑계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보호한다. 방어기제들이 작용하는 셈이다. 가족들은 중독자의 거짓말에 늘 속게 마련이다.
허근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총대리주교였던 김옥균 주교의 충고도 받았지만 허사였다.
“아침에 ‘주교님, 오늘부터는 술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해놓고 바로 점심에 신자와 술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지요. 가족에게 약속해놓고 거짓말을 한 것과 뭐가 달라요.”
평소 그를 아끼던 김옥균 주교의 충고와 눈물로 그는 술을 끊기 위해 광주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중독을 인정하고, 중독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들이 이뤄졌다.
“나와 같이 중독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사목하자는 생각이 생겼어요. 병원에서 받았던 치료는 신체, 심리치료 뿐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영적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퇴원하고 중독에서 빠져나왔다 해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던질 눈초리들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중독’을 겪었기에 ‘중독’에 걸린 신자들을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중독자들을 위한 사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 세 잔
1999년 단중독사목위원회가 설립된 이래로 현재 위원회가 실시하는 중독치료과정 참가자들의 회복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올해 초 실시한 치료과정 참가자 18명 중 현재까지 2명만 탈락했을 뿐, 모두 단주의 결심을 이어가고 있다. 사목센터에서 면담을 했던 사람 중 70%가 단주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비율도 90%이상이다.
중독자와 함께 병들어가는 가족들과의 상담도 빼놓지 않는다. 중독자들의 횡포와 거짓 약속에 속아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혼’까지 갈 뻔 했던 부부를 다시 금슬 좋게 했으니 가정사목까지 덤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술에 취한 채로 상담을 와 ‘이놈, 저놈’ 거친 소리를 듣기도 하고,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찾아와 금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중독자 등을 만날 때면 그는 온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는 듯하다. 술을 끊었지만 아직도 술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단중독사목위원회의 회식문화에 대해 물었다.
“술은 먹지 않고 음료수로 대신합니다. 우리는 술 먹지 않아도 노래도 잘 부르고 이야기도 잘 해요.”
단중독사목위원회는 7월 19일~20일 ‘중독으로부터의 회복 여정’을 열었다. 이번 피정에는 그동안 단중독사목위원회의 치료과정을 수료하고 중독을 털고 일어난 참가자들이 후배 중독자들을 위해 봉사자로 참여했다. 제2, 제3의 허근 신부가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중독자들에게 비난의 손가락질만 보내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가족, 친구, 회사 모두가 그들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합니다.”
허근 신부는 이제 손에서 술잔을 내려놨다. 대신 중독자와 그 가족들에게 선사할 희망의 잔을 준비한다. 그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중독자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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